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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문 예시

인용

논술을 쓸 때 처음에 쓸 내용 (문제 상황 제시 인용 정의 경험 등) 중간에 쓸 내용, 끝에 내용을 설명했는데 구체적인 예문을 보여 주면 더 효과적일 거 같아요. 혹시 가지고 계신 분 있으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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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의 익명성 극복>

   대량 생산을 특징으로 하는 현대 사회는 수많은 개인들로 하여금 익명적인 존재로 전락하게 하였다.'어린 왕자'에서는 여우와 어린 왕자의 대화를 통하여, 이러한 현대 사회의 역기능적 측면을 함축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현상을 초래한 원인과 그것의 치유 방안까지도 나타나 있다. 이제 이 작품에 나타난 이러한 함축적 의미를 살펴보면서, 조직화된 현대 사회에서 개인의 노력이 어떤 의의와 한계를 지니고 있으며, 또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인가에 대해 고찰해 보기로 한다.

   현대 대중 사회에서 개인의 익명성을 생겨나게 하는 사회적 조건은, 여우의 "사람들은 이제 무얼 알 시간조차 없어지고 말았어. 사람들은 다 만들어 놓은 물건을 가게에서 산단 말이야. 그렇지만 친구는 파는 데가 없으니까, 사람들은 이제 친구가 없게 되었단다.…"라는 말에서 대중 사회의 상품화 현상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대중 사회는 대량 생산을 특징으로 하는데, 상품을 대량 생산하면 상품은 획일화될 수밖에 없으며, 획일화된 대랴의 상품이 나도는 세상에서는 인간도 획일화되고 만다. 따라서, 개성을 상실한 인간이 익명성을 지니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모든 것이 상품화되고 획일화된 사회에서 개인의 정서적 유대 관계 형성을 위한 노력은 비록 미약하나마 상실된 인간성을 회복하여 삶의 의미와 보람을 찾을 수 있게 할 것이다. 설혹 개인 간의 이러한 노력이 현대 사회라는 거대 구조 앞에서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격밖에 안된다고 할지라도 현대 사회가 나아가야 할 이념적 지표 역할을 한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하지만 정서적 유대 관계 형성을 위한 개인의 노력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현대 사회는 거대한 사회 조직 내에서 표준적으로 획일적인 통제가 이루어지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몇몇 개인이 열성적으로 정서적 유대 관계의 형성을 주장하고 또 그것을 실천해 나간다 해도 그것은 소집단 내부의 관계에 국한되기 십상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거대 사회의 대중들로부터 오히려 소외당하게 될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개인적 노력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으로는 우선 개인적 노력을 동아리 활동이나 사회적 캠페인으로 확대하는 것이다. 왜냐 하면, 이것은 인간 가치를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환경 보전 캠페인이 사회적인 공감대 속에서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듯이, 인간 가치를 중시하는 사회적 캠페인도 산업 사회의 인간 소외 현상을 경험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전통적인 정신 문화를 현대 사회에 적합성을 유지하도록 계승, 발전시키는 것도 필요하다. 우리의 전통 문화는 '정(情)'의 문화라 할 수 있을 만큼 조상들은 인정의 교류를 중시해 왔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의 모래알과 같이 개성을 잃고 기계의 부품과 같은 존재가 되고 말았는데 이러한 현상이 사회의 발달 단계상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의 이면에는 전통적인 정의 문화를 발전적으로 계승하지 못한 탓도 있다고 본다. 전통적인 정의 문화를 현대 사회에 적합성을 지닐수 있도록 발전적으로 계승해 나간다면 개인 간의 인간적 유대 관계의 형성은 사회적 차원의 것으로 승화될 것이다.

   이상의 방안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개인을 단위로 하여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비록 그 한계가 있다. 하지만 현대 사회의 인간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개인적 자각과 노력이 필요하며 아울러 이러한 개인적 자각, 노력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을 병행, 실시해 나간다면 현대인의 익명성을 극복하는 데 더 큰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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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에 기초한 제도 비판>

  우리 사회의 부정 부패와 불신 문제는 이제 도를 넘어섰다고 생각된다. 전직 대통령 두 명의 구속과 현직 대통령 아들의 구속부터 일선 학교 교사의 촌지 수수 행위까지, 사회의 모든 영역에 걸쳐 부정 부패가 만연해 있고, 이 때문에 국민 사이에서는 불신의 벽이 높아 가고 있다. 따라서 현재 이 문제의 해결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일부 사람들은 '불신에 기초한 제도'를 만들어 해결하자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기본적으로 인간을 불신하는 관점에 기초하고 있다. 이처럼 인간을 믿을 수 없다고 하는 주장의 근저에는 '인간은 이기적 존재'라는, 또는 최소한 인간은 '이타적인 존재는 아니다'라는 논리적 근거가 깔려 있다. 왜냐하면 인간이 이타적이고, 그래서 인간이 사익보다는 공익을 더 추구하는 존재라고 한다면 인간을 믿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 곳곳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이기적 본성은 이런 관점의 정당성을 뒷받침해 준다. 또 이 주장은 이런 관점에 입각하여 사회적인 차원에서 문제를 해결할 것을 주장한다. 즉 '불신에 기초한 제도'를 만들어 인간의 이기성과 그에 따르는 부정 부패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이 주장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먼저 이 주장은 인간을 일면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인간은 분명 이기적인 존재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믿을 수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인간이 이기적인 존재인 것만은 아니다. 즉 사람들은 때때로 자기의 이익을 희생하면서 사회와 국가, 민족의 이익을 도모한다. 우리는 이런 예를 역사를 통해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기적인 인간을 불신하는 동시에 이타적인 인간을 신임할 수 있다. 이 관점에 설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순히 인간의 이기적 측면에 근거하여 '불신에 기초한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인간의 이타심을 함양시킬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교육과 선도, 계몽 등의 다른 방법을 써서 인간의 이타심을 함양시켜야 한다. 즉 '불신에 기초한 제도'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일 수는 없는 것이다.

   다음으로 이 주장은 설사 실현된다 하더라도 많은 문제를 야기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철저하게 인간에 대한 불신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제도가 집행되면 사람들 사이에 더욱 커다란 불신, 인간을 정말로 믿을 수 없다는 확신을 조장할 수 있다. 또 이런 제도를 실행하다 보면 사회적 긴장감--이기적 행위의 단속을 위한 감시와 처벌 등--은 증폭된다. 결국 우리가 실현해야 할 공동체 정신과 공익 정신은 함양할 수 없고, 극단적인 개인주의와 또 다른 불신만을 '제도화'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불신에 기초한 제도'가 전혀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다. 이 방법은 우리 사회처럼 총체적인 불신과 부정 부패가 만연하여 인간의 이타심과 공익 정신이 사라진 곳에서는 단기적인 처방으로 효과를 볼 수 있다. 또 인간의 이타심이라는 것이 일시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며, 그것만으로써 효과를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면에서 불신에 기초한 제도는 어느 정도 타당성을 갖는다. 하지만 그것은 사후적인 처벌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사회의 부정 부패를 막는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

   이상으로 불신에 기초한 제도의 문제를 살펴보았다. 우리 사회의 불신과 부정 부패는 하루 아침에 해결할 수 없다. 그렇다고 인간이 이기적이라는 일면만을 강조하여 불신에 기초한 제도를 만드는 것으로는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불신에 기초한 제도와 함께 인간의 이타심을 함양시킬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공동체 정신과 공익 정신을 전 사회에 가득 차게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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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언어 생활>

   몇 년 전 '국민학교'라는 이름을 '초등학교'라고 개명한 일이 있었다. 각 학교가 문패 및 각종 공문서를 고치느라 많은 돈과 시간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러한 개명에 찬성하였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국민학교'라는 이름에 일제의 잔재가 섞여 옳지 못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어떠한 사물의 명칭은 단순히 그 사물을 가르키는 것을 넘어서 그 사물의 성격까지도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관습화되고 있는 언어 용법 가운데도 잘못된 것들이 많이 있다. 그 예를 몇가지 들어보면 첫째, 역사적 사건에 대한 왜곡 의도로 만들어진 명칭이 있다. '5·16 군사혁명'이나 '광주민란' 등이 그 예이다. 이 명칭들은 다행히 몇년전 '5·16 군사정변', '광주 민주화 항쟁'으로 개명되었으나 개명 전에는 5·16은 혁명이므로 올바른 것이며, 광주 사건은 정부에 반기를 든 잘못된 행동이므로 무력 진압은 정당하다는 인식을 심어 주었다. 둘째, 남녀의 성 역할의 분리를 나타내는 명칭이 있다. 우리는 흔히 쾌활하고 씩씩한 사람을 가르켜 '남자답다'고 하고, 조용하고 얌전하며 자상한 성격을 가진 사람을 '여
성스럽다'고 한다. 이것은 무의식중에 남자는 쾌활하고 씩씩해야 하며, 여자는 조용하고 얌전하며 자상한 성품을 가져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아내가 남편을 가르켜 '바깥주인'이라고 하는 것이나, 남편이 아내를 가르켜 '안사람'이라 이르는 것도 모두 잘못된 명칭들이다. 남편은 바깥 일을 보고 아내는 안에 머물러야 한다고 무의식중에 규정하고 있으며, 더욱이 아내가 남편을 자신의 '주인'이라 일컬음으로써 아내가 남편에게 종속되어 있는 느낌을 주게 된다.

   이러한 잘못된 언어 용법을 고치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프랑스의 경우 '한림원'이 있어 잘못된 명칭을 바로 잡고 있다. 우리 나라도 이처럼 언어를 바로 잡는 기관을 만들어 잘못된 언어들을 규정하고서 대중 매체 및 공문서에 잘못된 언어가 쓰이지 못하게 규제하고, 각종 캠페인을 벌여 사람들이 차츰 잘못된 언어를 사용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모두가 알다시피, 언어는 하루 아침에 생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고치기도 어렵다. 그러나 언어는 사람들의 의식을 무의식중에 규정하는 것이다. 잘못된 언어 용법은 사람들의 의식을 잘못되게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잘못된 언어 용법을 바로 잡기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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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공동체의 이상 실현>

   예로부터 사람들은 전 인류가 서로 형제처럼 화합하면서 평화롭게 공존하는 이상을 염원해 왔다. 그것은 이른바 사해 동포주의 혹은 코스모폴리타니즘이라고 불리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이념이나 종교, 혹은 인종 등과 같은 여러 가지 이유로 갖은 반목과 대립 속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았고, 그러는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이 불행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대립과 반목의 결과가 참혹하면 참혹할수록 사람들에게 있어서 인류 공동체의 실현이라는 이상은 더욱 절실한 것으로 대두되었다.

   특히 근대 이후에 세계 각 지역에서 형성된 민족 국가들은 역설적으로 인류 공동체의 이상에 대한 염원을 더욱 강렬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일단 형성된 민족 국가들은 모두 자국의 국익을 위해 전력을 기울이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타국과의 끊임없는 마찰을 빚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20세기 전후로 하여 유럽의 선진 공업국들은 산업화를 바탕으로 세계의 여러 나라들을 식민지로 삼았으며, 그 과정에서 인류는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겪어야만 했다. 제국주의를 추구하면서 자국의 국익만을 앞세웠던 선진 공업국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이들에 의해서 식민지의 고통을 겪어야만 했던 약소국들에서도 모두 배타적인 민족주의가 자라나게 되었고 중요한 가치로 인정됨으로써 국가와 인류 공동체는 서로 양립하기 어려운 존재라고 생각되기에 이르렀다.

   물론 다른 나라를 식민지로 삼게 되면 자국의 국민들에게는 많은 이득이 생기고 국내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기회도 주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익이란 결국 국가간의 무한 경쟁과 대립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장기적인 안목에서 보면 결코 그 나라 국민들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국가간의 대립과 무한 경쟁 속에서 모든 국가는 언제나 외국과의 긴장 관계를 유지해야 되고, 그러는 가운데 군비의 확충이라든가 외교적 갈등과 같은 문제들을 끊임없이 감수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결국 현실의 많은 나라들이 추구하고 있는 민족주의, 즉 배타적인 민족주의는 국가간의 긴장과 대결 구도를 만듦으로써 불필요하고 소모적이기만한 경쟁과 전 인류적 피해를 낳고 말았다. 아마도 국가간의 패권주의가 낳은 군비 경쟁에 들어간 자원과 인력을 인류 공동체의 복지 향상을 위해 사용했다면 현재의 인류는 훨씬 더 향상된 삶의 질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배타적인 민족주의로서는 평등하면서도 협력적인 국가 관계를 이룩할 수 없고 국가들 사이에는 언제나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민족주의가 하루 아침에 사라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특히 아직까지 제대로 민족 국가의 형성을 이루지 못한 곳에서는 더욱 절실한 과제이기도 하다.

   마무리하자면, 인류 공동체의 발전을 위해서는 우선 각국이 제대로 된 민족 국가를 형성한 후, 타국에 대한 배타적인 자세를 버리고 개방적이고 협력적인 국제 관계를 이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국가간의 평등한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국가간의 평등한 관계가 정착되어야만 국가들은 올바른 의미의 국제 사회를 창출할 수 있고, 그 이후에 국제 사회의 여러 문제를 국제 기구를 통해서 해결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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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리주의와 쾌락주의>

  헬레니즘 시대의 에피쿠르스 학파는 최대의 행복을 이루기 위해서 쾌락의 추구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즉, 행복은 쾌락에 비례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의 생각이 천하다고 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에피쿠르스 학파의 사상은 후에 공리주의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공리주의의 대표적 사상가인 밀은 에피쿠르스적 쾌락주의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비판한는 견해들을 논박했다. 그의 주장은 인간의 쾌락이 동물의 그것과는 비교도 안된다는 것이다. 즉, 단순한 육체적, 물리적 쾌락이 아닌, 정신적인 훨씬 높은 차원의 쾌락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이 두가지 쾌락을 경험했다면 그는 그 중에서도 더 질높은 쾌락을 선택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의 현실에서는 어떨까?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저급한 문화의 확산으로 인해 저급한 쾌락을 탐닉한다. 그들은 물질 만능주의에 사로잡혀 있고, 육체적 쾌락을 추구한다. 이러한 현상은 곧바로 사회 문제로 이어진다. 그들은 돈이나 권력에 얽매여 사리에만 집착한 나머지 극단적 이기주의에 빠져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힌다. 이것은 공리주의와 질적 쾌락주의를 주장한 밀의 주장과는 상반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최근에 들어서 '조용한 혁명'이라 하여 물질적 쾌락보다 정신적 쾌락을 중요시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즉, 더 높은 차원의 질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직업의 선택에 있어서 과거에는 무조건 권력, 명예, 돈을 중요시 했지만 최근에는 자아 실현이나 적성을 고려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바로 진정한 행복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들은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하기 때문에 물질적인 대가가 크지 않아도 즐겁게 일을 해서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우리는 밀의 주장에 따라 질적 쾌락을 추구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물질적 쾌락주의에 젖어있는 사회는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이 아닌 불행을 가져다 준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조용한 혁명'이라는 것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더욱 확산시켜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에피쿠르스 학파가 그 시대에 맹렬한 비난을 받았지만 우리가 그것을 되풀이하는 우를 범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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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왜 정의로워야 하는가>

인간은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언제나 개인으로서가 아닌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존재해 왔다. 과거 어느 시대를 살펴보더라도 인간이 '사회' 라고 하는 집단을 형성하고, 그 속에서 안정과 행복을 추구하며 삶을 영위해 왔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개인으로 하여금 안정감과 행복을 누릴 수 있게 하는 사회의 기능을 가능하게 하는 요인은 무엇인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사회에는 나름대로의 도덕적 덕목과 그것이 강제화된 규범과 제도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도덕, 규범 체계는 각 사회의 고유한 환경과 맥락에 따라 차이를 보이기도 하지만, 그 내용면에서 정의로움이나 성실, 정직과 같은 덕목을 공통적으로 요구한다. 사회에 이러한 보편적인 도덕 규범 체계가 있고, 구성원이 이를 준수하기 때문에 개개인의 인간다운 삶이 가능하고 사회가 안정되고, 발전해 나갈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살펴볼 때, 제시문의 주장은 여러 모로 타당하지 못하다. 제시문에서는 우연히 신비한 가락지를 얻고 결국에 부도덕한 일들을 저지르고 마는 양치기의 이야기를 토대로, 개인에게는 정의보다는 불의가 이익이 되며, 인간은 강제에 의해 정의의 덕목을 지키게 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그러나 과연 실질적으로 불의가 정의보다 많은 이익을 보장해 주는 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제시문에서처럼 한 개인이 신비한 반지를 갖게 되어, 마음대로 재화와 권력을 소유하고, 죽이고 싶은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하자. 그렇게 되었을 때, 그가 당장에는 자신의 극대화된 자유에 만족해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반지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 있었다면 그 사회는 결국 어떻게 될 것인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욕심을 추구하고, 욕망을 성취하려고 하는 가운데 '자유의 역리' 현상이 나타나게 되어 사회에는 불신과 불의만이 팽배한 아수라장이 되고 말 것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개인은 자신의 신변과 재산에 대해 심한 불안을 느끼게 될 것이며, 성실한 노력이나 노동의 의욕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우리는 개인이 정의의 덕목을 망각하고 불의를 추구하는 것은 그가 속한 사회뿐 아니라 당사자에게도 불이익과 파멸을 가져옴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인간이 과연 사회의 강제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정의의 덕목을 지키게 되는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하는 가장 큰 특징은 이성과 자유 의지를 갖는다는 점이다. 인간은 이성을 가짐으로 해서 겪어 보지 않은 상황을 예측하고 그에 대처할 능력을 가지며, 자유 의지를 가짐으로 인해 부당한 요구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 자율성을 지닌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이 수동적으로 사회의 정의에 대한 요구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불의가 가져올 폐해를 인식하고 능동적으로 정의의 덕목을 준수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위에서 살펴 본 내용을 토대로 할 때, 인간은 합리적인 판단과 자유 의지로 '정의'를 추구하고 있으며, 그 '정의'는 구성원 최대 다수의 행복을 보장하고 그들이 더욱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는 데에 도움을 준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정의'는 개인과 그가 속한 사회를 무질서와 파멸로부터 지켜주는 울타리가 되며 동시에 인간에게 이성과 자유 의지가 존재함을 증명하는 증거가 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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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변신과 인간 소외 문제>

과학 기술과 산업의 발달은 인류에게 생활의 편리함과 물질적 풍요로움을 가져다 주었지만, 동시에 고도로 기계화된 산업 사회 체제 속에서 많은 문제를 안겨 주었다. 과학 기술에 의한 인간 지배, 환경 오염과 생태계 파괴, 생명 경시 풍조 등 다양한 문제는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상황이 되었다. 특히 산업 사회 속에서 인간이 자아를 상실하고 점점 파편화되며 인간 상호간의 의사 소통이 단절되는 상황은 인간의 삶에 심각한 위협이 된다.

<변신>에서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하던 주인공 그레고르는 한 마리 벌레가 된 후에 가족으로부터 냉대를 받게 되고 혐오의 대상이 된다. 그레고르의 존재 자체는 변신 이전이나 이후나 변함이 없으나, 지극히 이기적인 사고 방식을 가진 주변에서는 허위 의식을 바탕으로 그를 멸시하게 된다. 서로간의 슬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지 않는 이웃과 친구 사이에 둘러싸인 사람은 개인의 고통을 이겨 내기 힘들고, 이 때 그는 삶의 지표를 잃고 방황하게 된다. 인간 상호간의 소통이 단절된 사회는 아무리 사회가 물질적으로 풍요하고 사회적 질서가 견고하다고 하더라도, 개개의 사회 구성원들이 뿌리를 잃게 되고 결국 소외감을 느끼게 된다. 이 제시문의 내용은 인간이 현대 문명에 의해 소외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 소외 현상의 발생 원인으로 우선 사회 조직의 거대화와 관료제화를 들 수 있다. 산업 사회의 발달은 필연적으로 거대하고 치밀한 조직을 요구한다. 현대인은 거대한 조직 속에서 부속품에 불과한 구성원으로서의 자기를 발견하게 되는데, 여기서 개성이나 인격, 개인적인 희망은 무시되고 자아 상실과 소외감을 느끼게 된다. 또한 대중 사회의 출현을 원인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현대인은 서로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들 속에 묻혀 살고 있는데, 익명적 대중 속에서 인간은 철저하게 고립된 인간이 된다. 공동체의 붕괴와 가족의 해체 위기 등이 이와 관련된다.

그러면 이러한 소외 현상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으로 어떤 것들이 있을까? 우선 이기적인 의식에서 벗어나 사회 구성원들이 함께 살아간다는 공동체 의식을 지니도록 해야 한다. 극단적인 이기주의 풍조 속에서 사회는 올바르게 유지될 수 없을 것이다. 구성원 각자가 이웃을 존중하고 사랑하며 공동체 의식을 가질 때, 그 사회는 그만큼 건강성을 유지할 것이고 진정한 인간적 가치가 존중될 것이다. 그리고 타인의 입장을 배려하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생활 태도를 지녀야 한다. 타인에 대한 배려 없이 자신에 대한 타인의 배려를 강요할 수는 없다. 남의 입장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속에서 사람들은 사회의 참다운 가치를 이해할 수 있고, 서로 유대감을 지닐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회 구성원 모두가 인간 소외의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소외 현상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지녀야 한다는 점이다.

사회 구성원 상호간에 소통과 이해가 단절된 상황에서는 아무리 물질적으로 풍요하다고 하더라도 결코 가치 있는 삶을 산다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사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상호 유대감을 바탕으로 인간적 가치를 최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의식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 각자가 극단적인 이기주의를 버리고, 인간 관계의 단절을 극복하기 위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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