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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기쁨에게 -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
게스트다음에서 인용 게스트 2022년 03월 18일, 1:20 오전(으)로선생님들, 고1국어 미래엔 교과서 쓰는 분들 계신가요.
정호승 '슬픔이 기쁨에게' (미래엔) 질문드립니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에서 '봄눈'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지도서에는 함박눈(부정적)과 대비되는 '약자를 감싸는 존재'라고 되어있는데요. 보리에 대해 찾아보니 '겨울눈은 보리를 덮어 풍년 들게 하고, 봄눈은 녹아 보리를 얼려서 흉년 들게 한다'는 속담이 있더라고요. 이런 보리의 생장을 생각하면 단순히 봄+눈이라는 단어 조합으로 따뜻하고 포근한 이미지로 시어를 읽을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오히려 봄눈이 춘궁기에 고통을 가하는 존재이고, 이것을 걷어내겠다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이 드는데요. 지도서와 참고서 등에는 모두 약자를 포근히 감싸는 긍정적인 존재로 보고 있어요.
수업하시는 선생님들의 의견이 궁금합니다.
선생님들, 고1국어 미래엔 교과서 쓰는 분들 계신가요.
정호승 '슬픔이 기쁨에게' (미래엔) 질문드립니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에서 '봄눈'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지도서에는 함박눈(부정적)과 대비되는 '약자를 감싸는 존재'라고 되어있는데요. 보리에 대해 찾아보니 '겨울눈은 보리를 덮어 풍년 들게 하고, 봄눈은 녹아 보리를 얼려서 흉년 들게 한다'는 속담이 있더라고요. 이런 보리의 생장을 생각하면 단순히 봄+눈이라는 단어 조합으로 따뜻하고 포근한 이미지로 시어를 읽을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오히려 봄눈이 춘궁기에 고통을 가하는 존재이고, 이것을 걷어내겠다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이 드는데요. 지도서와 참고서 등에는 모두 약자를 포근히 감싸는 긍정적인 존재로 보고 있어요.
수업하시는 선생님들의 의견이 궁금합니다.
엄지손가락을 내리려면 클릭합니다.0좋아요를 클릭합니다.0게스트다음에서 인용 게스트 2022년 03월 18일, 1:20 오전(으)로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4395854&cid=47303&categoryId=47303
저는 이 부분 참고해서 수업했습니다~
https://post.naver.com/viewer/postView.naver?volumeNo=32892373&memberNo=5246326&vType=VERTICAL
찾아보니 이런 기사도 있네요 ㅎ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4395854&cid=47303&categoryId=47303
저는 이 부분 참고해서 수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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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보니 이런 기사도 있네요 ㅎ
엄지손가락을 내리려면 클릭합니다.0좋아요를 클릭합니다.0게스트게스트다음에서 인용 게스트 2022년 03월 18일, 1:20 오전(으)로저는 시를 볼 때 시어의 의미는 시 전체의 맥락에서 찾아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시 자체가 절제된 언어로 많은 함축성을 가지기도 하고 작가가 새로운 의미를 창조해 내기도 하기 때문이지요
저는 시를 볼 때 시어의 의미는 시 전체의 맥락에서 찾아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시 자체가 절제된 언어로 많은 함축성을 가지기도 하고 작가가 새로운 의미를 창조해 내기도 하기 때문이지요
엄지손가락을 내리려면 클릭합니다.0좋아요를 클릭합니다.0게스트다음에서 인용 게스트 2022년 03월 18일, 1:20 오전(으)로나는 이제 벽을 부수지 않는다
따스하게 어루만질 뿐이다
벽이 물렁물렁해질 때까지 어루만지다가
마냥 조용히 웃을 뿐이다
웃다가 벽 속으로 걸어갈 뿐이다
벽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면
봄눈 내리는 보리밭길을 걸을 수 있고
섬과 섬 사이로 작은 배들이 고요히 떠가는
봄바다를 한없이 바라볼 수 있다
정호승 시인의 다른 작품인데 작가는 봄눈에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나는 이제 벽을 부수지 않는다
따스하게 어루만질 뿐이다
벽이 물렁물렁해질 때까지 어루만지다가
마냥 조용히 웃을 뿐이다
웃다가 벽 속으로 걸어갈 뿐이다
벽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면
봄눈 내리는 보리밭길을 걸을 수 있고
섬과 섬 사이로 작은 배들이 고요히 떠가는
봄바다를 한없이 바라볼 수 있다
정호승 시인의 다른 작품인데 작가는 봄눈에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엄지손가락을 내리려면 클릭합니다.0좋아요를 클릭합니다.0게스트다음에서 인용 게스트 2022년 03월 18일, 1:21 오전(으)로함박눈도 봄 눈도 눈이지만 '내리는'함박눈은 겨울을 의미하면서 추위, 시련 고통을 주는 존재고 그것을 보면서 힘겨운 존재들의 슬픔을 보여줌으로써 공감을 하도록 하고 '눈이 그친 눈길을 걸어가는것'은 이제 더시련이 더이상 오지는 않지만 그 상황을 함께 걸어가며 그들을 살펴보고 공감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해서 긍정적인 상황으로 이해했습니다. '봄눈'은 그 길에서 '데리고'함께 걷는 존재로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겠지요
그러면 봄눈의 의미는 긍정적으로 해석해 내야하고 ' 함박눈'처럼 거대한 시련이기 보다는 부드럽게 내려서 대지를 감싸는 존재'로 해석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봄눈은 표상적 사전적 의미의 봄눈이 아니라
맥락적, 창조적 상징의 의미입니다 따라서 봄눈을 봄눈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따뜻하게 감사주는 의미로 해석해야 합니다
함박눈도 봄 눈도 눈이지만 '내리는'함박눈은 겨울을 의미하면서 추위, 시련 고통을 주는 존재고 그것을 보면서 힘겨운 존재들의 슬픔을 보여줌으로써 공감을 하도록 하고 '눈이 그친 눈길을 걸어가는것'은 이제 더시련이 더이상 오지는 않지만 그 상황을 함께 걸어가며 그들을 살펴보고 공감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해서 긍정적인 상황으로 이해했습니다. '봄눈'은 그 길에서 '데리고'함께 걷는 존재로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겠지요
그러면 봄눈의 의미는 긍정적으로 해석해 내야하고 ' 함박눈'처럼 거대한 시련이기 보다는 부드럽게 내려서 대지를 감싸는 존재'로 해석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봄눈은 표상적 사전적 의미의 봄눈이 아니라
맥락적, 창조적 상징의 의미입니다 따라서 봄눈을 봄눈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따뜻하게 감사주는 의미로 해석해야 합니다
엄지손가락을 내리려면 클릭합니다.0좋아요를 클릭합니다.0게스트다음에서 인용 게스트 2022년 03월 18일, 1:21 오전(으)로다들 좋은 말씀 해 주셨네요.
맨마지막에 답해주신 선생님의
"-해석해야 합니다"는
"본인은 그렇게 해석합니다"로 받아들이시면 좋겠습니다.
선생님의 맨 처음 접근법도 틀리지 않았습니다.
다들 좋은 말씀 해 주셨네요.
맨마지막에 답해주신 선생님의
"-해석해야 합니다"는
"본인은 그렇게 해석합니다"로 받아들이시면 좋겠습니다.
선생님의 맨 처음 접근법도 틀리지 않았습니다.
엄지손가락을 내리려면 클릭합니다.0좋아요를 클릭합니다.0게스트다음에서 인용 게스트 2022년 03월 18일, 1:21 오전(으)로오전에 오간 글들을 읽고 답글을 쓰려니 너무 길어져서 링크로 만들었습니다. 참고만 하셔요. https://brunch.co.kr/@zipnumsa/79
그나저나 저는 "슬픔이 기쁨에게" 시에 나오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마" 하는 부분을 읽을 때면 늘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에 나오는 -가난뱅이를 때리자'가 생각나요 ^^
원문: http://no-smok.net/nsmk/%EA%B0%80%EB%82%9C%EB%B1%85%EC%9D%B4%EB%A5%BC%EB%95%8C%EB%A6%AC%EC%9E%90
해석: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617479.html
오전에 오간 글들을 읽고 답글을 쓰려니 너무 길어져서 링크로 만들었습니다. 참고만 하셔요. https://brunch.co.kr/@zipnumsa/79
그나저나 저는 "슬픔이 기쁨에게" 시에 나오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마" 하는 부분을 읽을 때면 늘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에 나오는 -가난뱅이를 때리자'가 생각나요 ^^
원문: http://no-smok.net/nsmk/%EA%B0%80%EB%82%9C%EB%B1%85%EC%9D%B4%EB%A5%BC%EB%95%8C%EB%A6%AC%EC%9E%90
해석: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617479.html
엄지손가락을 내리려면 클릭합니다.0좋아요를 클릭합니다.0게스트다음에서 인용 게스트 2022년 03월 27일, 4:00 오전(으)로
Quote from Guest on 2022년 03월 18일, 1:21 오전
오전에 오간 글들을 읽고 답글을 쓰려니 너무 길어져서 링크로 만들었습니다. 참고만 하셔요. https://brunch.co.kr/@zipnumsa/79
그나저나 저는 "슬픔이 기쁨에게" 시에 나오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마" 하는 부분을 읽을 때면 늘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에 나오는 -가난뱅이를 때리자'가 생각나요 ^^
원문: http://no-smok.net/nsmk/%EA%B0%80%EB%82%9C%EB%B1%85%EC%9D%B4%EB%A5%BC%EB%95%8C%EB%A6%AC%EC%9E%90
해석: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617479.html
가난뱅이를때리자
보들레르
나는 보름 동안이나 방안에 들어박혀서 당시(십 육칠년 전의 일이었다) 유행하고 있었던 책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즉 스물 네 시간 내에 민중을 행복하고 슬기롭고 부유하게 만드는 방법이 다루어져 있는 책들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일반 대중의 행복에 관한 그 모든 기업가들의 ㅡ 다시말하자면, 모든 가난뱅이들에게 노예가 되라고 충고하고, 가난뱅이들은 모두 왕좌에서 쫓겨난 왕이라고 설복하고 있는 사람들의 노작(勞作)을 샅샅이 소화하였다, 아니, 차라리 삼켰다고나 할까. ㅡ 그러므로 그 때 내가 혼미 또는 우둔에 가까운 정신상태에 있었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나는 다만 내 지성의 안쪽에, 내가 요즘에 사전 속에서 훑어 본, 모든 착한 여성을 위한 상투어보다는 더 훌륭한 관념이 어렴픗이 싹터옴을 느끼는 듯 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관념의 관념이요, 한없이 막연한 것에 불고하였다.
그래서 나는 심한 갈증을 느끼면서 밖으로 나왔다. 왜냐 하면, 나쁜 책을 읽는다는 이 정열적인 취미는, 그에 비례하여, 신선한 공기와 청량제를 필요하게 하기 때문이다.
내가 어느 술집에 막 들어가려고 했을 때, 거지 하나가 나에게 모자를 내밀었다. 그 눈초리야말로, 만약에 정신이 물질을 움직이고 최면술자의 눈이 포도를 익게 한다면 왕좌라도 전복시킴직한 그런 잊지 못할 눈초리였다.
동시에 나는 내 귀에 속삭이는 목소리를, 내 귀에 잘 익은 목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어디든지 나를 따라다니는 '수호신'의 목소리 또는 '수호의 악마'의 목소리였다. 소크라테스도 그의 '수호의 악마'를 가지고 있었으니, 난들 왜 '수호신'을 갖지 말라는 법이 있겠는가, 난들 왜, 소크라테스처럼, 노련한 레뤼와 신중한 바야르제가 서명한 내 광증의 증명서를 얻을 영광을 갖지 말라는 법이 있겠는가?
소크라테스의 악마와 내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잇다. 즉 소크라테스의 것은 방어하고 경고하고 금지하기 위해서 밖에는 그에게 나타나지 않았지만, 내 것은 충고하고 암시하고 설복하여 준다는 점이다. 저 가엾은 소크라테스는 금지 주의자인 '악마'밖에 안 가지고 있었지만. 내 것은 위대한 긍정주의자이며, 행동의 '악마' 또는 투쟁의 '악마'이다.
그런데 그 목소리는 나에게 이렇게 속삭이는 것이었다. '평등함을 증명하는 자만이 남과 평등하며, 자유를 정복할 수 있는 자만이 자유를 누릴 가치가 있다.'
나는 즉시 거지에게 덤벼들었다. 그의 한쪽 눈에 주먹을 한 대 먹였더니, 그 눈은 대번에 부풀어 올랐다. 그의 이를 둘 부숴 주었으나, 덕분에 나도 손톱 하나가 부러졌다. 그리고 나는 태어나기를 연약할 뿐만 아니라 권투도 잘 한다고는 할 수 없는 터인지라, 이 늙은이를 당장에 때려 죽일 만큼 기운이 세다고는 생각하지는 않았으므로, 한 손으로 그의 옷깃을 잡고, 또 한 손으로는 그의 멱살을 움켜 쥐어, 그의 머리를 힘껏 벽에 부딪치기 시작하였다. 털어 놓고 말해야겠는데, 나는 미리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아서, 이 호젓한 교외에서는, 꽤 오랫동안, 경관들의 눈에 띄지 않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해 두었던 것이다.
그런 다음, 견갑골도 부러지도록 힘껏 등을 한 대 차서, 이 기진한 육십 노인을 쓰러뜨려 놓고서, 땅에 떨어져 있는 굵은 나무가지를 집어 들고, 비프스텍을 보드랍게 하려는 요리사처럼 끈덕진 기운으로 늙은이를 두드려 팼다.
갑자기, ㅡ 오 기적이로다! 오 자기 학설의 훌륭함을 증명한 철학자의 기쁨이 바로 이러하겠지! ㅡ 이 송장같던 늙다리가, 그토록 기구하게 망그라진 기계 속에 그런 힘이 들어 있었으리라곤 상상조차도 할 수 없었던 그런 힘을 내어, 홱 몸을 돌려 벌떡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내가 이건 좋은 징조로구나 하고 생각할 만큼 원망스런 눈을 하고, 이 늙어빠진 불한당은 나에게 덤벼들어 내 두 눈을 후려치고, 이를 네개나 부러뜨리고, 같은 나무가지로 나를 북치듯 사뭇 후려팼다. ㅡ 그러니, 내 과감한 치료법으로, 나는 그에게 긍지와 생기(生氣)를 되돌려 주었던 셈이다.
그러자 나는 온갖 몸짓을 다하여, 인제 싸움이 끝난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는 것을 그에게 알리고, 스토아파의 궤변가 같은 만족을 느끼면서 일어나 그에게 말하였다, '여보, 당신은 나와 평등하오! 부디 나에게 내 지갑의 돈을 당신과 나누어 갖는 영광을 베풀어 주오.그리고 당신이 정말 박애주의자라면, 잊지말고 당신의 모든 동료들에게 적용해야만 하오, 그들이 당신에게 적선을 바라는 날엔, 내가 가슴 아프게도 당신 등 위에 시험했던 이 학설을 말이오.'
그는 내 학설을 이해했다는 것과 내 충고에 복종하겠다는 것을 나에게 똑똑히 맹세하였다.
Quote from Guest on 2022년 03월 18일, 1:21 오전
오전에 오간 글들을 읽고 답글을 쓰려니 너무 길어져서 링크로 만들었습니다. 참고만 하셔요. https://brunch.co.kr/@zipnumsa/79
그나저나 저는 "슬픔이 기쁨에게" 시에 나오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마" 하는 부분을 읽을 때면 늘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에 나오는 -가난뱅이를 때리자'가 생각나요 ^^
원문: http://no-smok.net/nsmk/%EA%B0%80%EB%82%9C%EB%B1%85%EC%9D%B4%EB%A5%BC%EB%95%8C%EB%A6%AC%EC%9E%90
해석: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617479.html
가난뱅이를때리자
보들레르
나는 보름 동안이나 방안에 들어박혀서 당시(십 육칠년 전의 일이었다) 유행하고 있었던 책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즉 스물 네 시간 내에 민중을 행복하고 슬기롭고 부유하게 만드는 방법이 다루어져 있는 책들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일반 대중의 행복에 관한 그 모든 기업가들의 ㅡ 다시말하자면, 모든 가난뱅이들에게 노예가 되라고 충고하고, 가난뱅이들은 모두 왕좌에서 쫓겨난 왕이라고 설복하고 있는 사람들의 노작(勞作)을 샅샅이 소화하였다, 아니, 차라리 삼켰다고나 할까. ㅡ 그러므로 그 때 내가 혼미 또는 우둔에 가까운 정신상태에 있었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나는 다만 내 지성의 안쪽에, 내가 요즘에 사전 속에서 훑어 본, 모든 착한 여성을 위한 상투어보다는 더 훌륭한 관념이 어렴픗이 싹터옴을 느끼는 듯 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관념의 관념이요, 한없이 막연한 것에 불고하였다.
그래서 나는 심한 갈증을 느끼면서 밖으로 나왔다. 왜냐 하면, 나쁜 책을 읽는다는 이 정열적인 취미는, 그에 비례하여, 신선한 공기와 청량제를 필요하게 하기 때문이다.
내가 어느 술집에 막 들어가려고 했을 때, 거지 하나가 나에게 모자를 내밀었다. 그 눈초리야말로, 만약에 정신이 물질을 움직이고 최면술자의 눈이 포도를 익게 한다면 왕좌라도 전복시킴직한 그런 잊지 못할 눈초리였다.
동시에 나는 내 귀에 속삭이는 목소리를, 내 귀에 잘 익은 목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어디든지 나를 따라다니는 '수호신'의 목소리 또는 '수호의 악마'의 목소리였다. 소크라테스도 그의 '수호의 악마'를 가지고 있었으니, 난들 왜 '수호신'을 갖지 말라는 법이 있겠는가, 난들 왜, 소크라테스처럼, 노련한 레뤼와 신중한 바야르제가 서명한 내 광증의 증명서를 얻을 영광을 갖지 말라는 법이 있겠는가?
소크라테스의 악마와 내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잇다. 즉 소크라테스의 것은 방어하고 경고하고 금지하기 위해서 밖에는 그에게 나타나지 않았지만, 내 것은 충고하고 암시하고 설복하여 준다는 점이다. 저 가엾은 소크라테스는 금지 주의자인 '악마'밖에 안 가지고 있었지만. 내 것은 위대한 긍정주의자이며, 행동의 '악마' 또는 투쟁의 '악마'이다.
그런데 그 목소리는 나에게 이렇게 속삭이는 것이었다. '평등함을 증명하는 자만이 남과 평등하며, 자유를 정복할 수 있는 자만이 자유를 누릴 가치가 있다.'
나는 즉시 거지에게 덤벼들었다. 그의 한쪽 눈에 주먹을 한 대 먹였더니, 그 눈은 대번에 부풀어 올랐다. 그의 이를 둘 부숴 주었으나, 덕분에 나도 손톱 하나가 부러졌다. 그리고 나는 태어나기를 연약할 뿐만 아니라 권투도 잘 한다고는 할 수 없는 터인지라, 이 늙은이를 당장에 때려 죽일 만큼 기운이 세다고는 생각하지는 않았으므로, 한 손으로 그의 옷깃을 잡고, 또 한 손으로는 그의 멱살을 움켜 쥐어, 그의 머리를 힘껏 벽에 부딪치기 시작하였다. 털어 놓고 말해야겠는데, 나는 미리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아서, 이 호젓한 교외에서는, 꽤 오랫동안, 경관들의 눈에 띄지 않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해 두었던 것이다.
그런 다음, 견갑골도 부러지도록 힘껏 등을 한 대 차서, 이 기진한 육십 노인을 쓰러뜨려 놓고서, 땅에 떨어져 있는 굵은 나무가지를 집어 들고, 비프스텍을 보드랍게 하려는 요리사처럼 끈덕진 기운으로 늙은이를 두드려 팼다.
갑자기, ㅡ 오 기적이로다! 오 자기 학설의 훌륭함을 증명한 철학자의 기쁨이 바로 이러하겠지! ㅡ 이 송장같던 늙다리가, 그토록 기구하게 망그라진 기계 속에 그런 힘이 들어 있었으리라곤 상상조차도 할 수 없었던 그런 힘을 내어, 홱 몸을 돌려 벌떡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내가 이건 좋은 징조로구나 하고 생각할 만큼 원망스런 눈을 하고, 이 늙어빠진 불한당은 나에게 덤벼들어 내 두 눈을 후려치고, 이를 네개나 부러뜨리고, 같은 나무가지로 나를 북치듯 사뭇 후려팼다. ㅡ 그러니, 내 과감한 치료법으로, 나는 그에게 긍지와 생기(生氣)를 되돌려 주었던 셈이다.
그러자 나는 온갖 몸짓을 다하여, 인제 싸움이 끝난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는 것을 그에게 알리고, 스토아파의 궤변가 같은 만족을 느끼면서 일어나 그에게 말하였다, '여보, 당신은 나와 평등하오! 부디 나에게 내 지갑의 돈을 당신과 나누어 갖는 영광을 베풀어 주오.그리고 당신이 정말 박애주의자라면, 잊지말고 당신의 모든 동료들에게 적용해야만 하오, 그들이 당신에게 적선을 바라는 날엔, 내가 가슴 아프게도 당신 등 위에 시험했던 이 학설을 말이오.'
그는 내 학설을 이해했다는 것과 내 충고에 복종하겠다는 것을 나에게 똑똑히 맹세하였다.
엄지손가락을 내리려면 클릭합니다.0좋아요를 클릭합니다.0게스트다음에서 인용 게스트 2022년 03월 27일, 4:02 오전(으)로
Quote from Guest on 2022년 03월 27일, 4:00 오전
Quote from Guest on 2022년 03월 18일, 1:21 오전
오전에 오간 글들을 읽고 답글을 쓰려니 너무 길어져서 링크로 만들었습니다. 참고만 하셔요. https://brunch.co.kr/@zipnumsa/79
그나저나 저는 "슬픔이 기쁨에게" 시에 나오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마" 하는 부분을 읽을 때면 늘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에 나오는 -가난뱅이를 때리자'가 생각나요 ^^
원문: http://no-smok.net/nsmk/%EA%B0%80%EB%82%9C%EB%B1%85%EC%9D%B4%EB%A5%BC%EB%95%8C%EB%A6%AC%EC%9E%90
해석: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617479.html
가난뱅이를때리자
보들레르
나는 보름 동안이나 방안에 들어박혀서 당시(십 육칠년 전의 일이었다) 유행하고 있었던 책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즉 스물 네 시간 내에 민중을 행복하고 슬기롭고 부유하게 만드는 방법이 다루어져 있는 책들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일반 대중의 행복에 관한 그 모든 기업가들의 ㅡ 다시말하자면, 모든 가난뱅이들에게 노예가 되라고 충고하고, 가난뱅이들은 모두 왕좌에서 쫓겨난 왕이라고 설복하고 있는 사람들의 노작(勞作)을 샅샅이 소화하였다, 아니, 차라리 삼켰다고나 할까. ㅡ 그러므로 그 때 내가 혼미 또는 우둔에 가까운 정신상태에 있었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나는 다만 내 지성의 안쪽에, 내가 요즘에 사전 속에서 훑어 본, 모든 착한 여성을 위한 상투어보다는 더 훌륭한 관념이 어렴픗이 싹터옴을 느끼는 듯 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관념의 관념이요, 한없이 막연한 것에 불고하였다.
그래서 나는 심한 갈증을 느끼면서 밖으로 나왔다. 왜냐 하면, 나쁜 책을 읽는다는 이 정열적인 취미는, 그에 비례하여, 신선한 공기와 청량제를 필요하게 하기 때문이다.
내가 어느 술집에 막 들어가려고 했을 때, 거지 하나가 나에게 모자를 내밀었다. 그 눈초리야말로, 만약에 정신이 물질을 움직이고 최면술자의 눈이 포도를 익게 한다면 왕좌라도 전복시킴직한 그런 잊지 못할 눈초리였다.
동시에 나는 내 귀에 속삭이는 목소리를, 내 귀에 잘 익은 목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어디든지 나를 따라다니는 '수호신'의 목소리 또는 '수호의 악마'의 목소리였다. 소크라테스도 그의 '수호의 악마'를 가지고 있었으니, 난들 왜 '수호신'을 갖지 말라는 법이 있겠는가, 난들 왜, 소크라테스처럼, 노련한 레뤼와 신중한 바야르제가 서명한 내 광증의 증명서를 얻을 영광을 갖지 말라는 법이 있겠는가?
소크라테스의 악마와 내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잇다. 즉 소크라테스의 것은 방어하고 경고하고 금지하기 위해서 밖에는 그에게 나타나지 않았지만, 내 것은 충고하고 암시하고 설복하여 준다는 점이다. 저 가엾은 소크라테스는 금지 주의자인 '악마'밖에 안 가지고 있었지만. 내 것은 위대한 긍정주의자이며, 행동의 '악마' 또는 투쟁의 '악마'이다.
그런데 그 목소리는 나에게 이렇게 속삭이는 것이었다. '평등함을 증명하는 자만이 남과 평등하며, 자유를 정복할 수 있는 자만이 자유를 누릴 가치가 있다.'
나는 즉시 거지에게 덤벼들었다. 그의 한쪽 눈에 주먹을 한 대 먹였더니, 그 눈은 대번에 부풀어 올랐다. 그의 이를 둘 부숴 주었으나, 덕분에 나도 손톱 하나가 부러졌다. 그리고 나는 태어나기를 연약할 뿐만 아니라 권투도 잘 한다고는 할 수 없는 터인지라, 이 늙은이를 당장에 때려 죽일 만큼 기운이 세다고는 생각하지는 않았으므로, 한 손으로 그의 옷깃을 잡고, 또 한 손으로는 그의 멱살을 움켜 쥐어, 그의 머리를 힘껏 벽에 부딪치기 시작하였다. 털어 놓고 말해야겠는데, 나는 미리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아서, 이 호젓한 교외에서는, 꽤 오랫동안, 경관들의 눈에 띄지 않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해 두었던 것이다.
그런 다음, 견갑골도 부러지도록 힘껏 등을 한 대 차서, 이 기진한 육십 노인을 쓰러뜨려 놓고서, 땅에 떨어져 있는 굵은 나무가지를 집어 들고, 비프스텍을 보드랍게 하려는 요리사처럼 끈덕진 기운으로 늙은이를 두드려 팼다.
갑자기, ㅡ 오 기적이로다! 오 자기 학설의 훌륭함을 증명한 철학자의 기쁨이 바로 이러하겠지! ㅡ 이 송장같던 늙다리가, 그토록 기구하게 망그라진 기계 속에 그런 힘이 들어 있었으리라곤 상상조차도 할 수 없었던 그런 힘을 내어, 홱 몸을 돌려 벌떡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내가 이건 좋은 징조로구나 하고 생각할 만큼 원망스런 눈을 하고, 이 늙어빠진 불한당은 나에게 덤벼들어 내 두 눈을 후려치고, 이를 네개나 부러뜨리고, 같은 나무가지로 나를 북치듯 사뭇 후려팼다. ㅡ 그러니, 내 과감한 치료법으로, 나는 그에게 긍지와 생기(生氣)를 되돌려 주었던 셈이다.
그러자 나는 온갖 몸짓을 다하여, 인제 싸움이 끝난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는 것을 그에게 알리고, 스토아파의 궤변가 같은 만족을 느끼면서 일어나 그에게 말하였다, '여보, 당신은 나와 평등하오! 부디 나에게 내 지갑의 돈을 당신과 나누어 갖는 영광을 베풀어 주오.그리고 당신이 정말 박애주의자라면, 잊지말고 당신의 모든 동료들에게 적용해야만 하오, 그들이 당신에게 적선을 바라는 날엔, 내가 가슴 아프게도 당신 등 위에 시험했던 이 학설을 말이오.'
그는 내 학설을 이해했다는 것과 내 충고에 복종하겠다는 것을 나에게 똑똑히 맹세하였다.
보들레르의 파리나 우리의 서울에도 통용되는 간단한 사례를 살펴보는 것으로 보들레르 문학의 중요성은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바로 노숙자, 혹은 구걸하는 사람들이라는 풍경이다. 사실 노숙자들이 대도시의 풍경이 된 지 오래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은 공중전화 부스나 혹은 안내판을 지나치듯이 그들을 스쳐 지나가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 구걸하는 사람들은 당신의 가슴을 후비고 들어올 때가 있다. 절망 속에서 자신을 쳐다보는 멍한 눈을 보고서 마음이 동요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들의 눈은 외치는 것 같다. “같은 인간이면서 나를 도와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제 우리에게는 결단의 순간이 다가온다. 주머니를 뒤져서 동전 몇 푼이라도 그의 손에 쥐여주거나, 아니면 매몰차게 돌아서는 것이다. 적선을 통해 우리는 양심의 가책을 덜어낼 수 있다. 매몰차게 돌아서는 경우에도 우리는 자신의 양심을 달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읊조릴 수도 있을 것이다. “거지에게 적선을 하면 안 돼. 일시적으로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그는 계속 구걸을 할 테니까 말이야.”
구걸하는 사람과 눈이 마주쳤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행동이 이 두 가지밖에 없을까? 그렇지만 이 두 가지는 구걸하는 노숙자를 그대로 방치하는 냉소적인 행동에 불과하다. 영민한 보들레르는 제3의 행동, 그러니까 자본주의의 백신과도 같은 행동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내가 카바레에 들어서려고 할 때, 한 거지가 자신의 모자를 내게 내밀었다. 그런데 그의 시선은 잊을 수 없이 특별한 것이었다. 만일 정신이 물질을 움직이고 최면사의 눈이 포도들을 익게 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의 시선은 왕권을 붕괴시킬 수도 있을 것 같았다. (…) 바로 나는 거지에게 달려들었다. 단 한 번의 주먹질로 나는 그의 한 눈을 갈겼다. 눈은 순식간에 공처럼 커졌다. 그의 두 이를 부러뜨리는 데 나는 내 손톱 하나를 부러뜨렸다. 태어날 때부터 연약하며 권투에도 거의 숙달이 되지 않아, 충분히 강하지 못함을 깨달은 나는 이 늙은이를 재빨리 때리기 위해, 한 손으로는 그의 옷깃을 붙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목을 움켜쥐고 벽에 대고 그의 머리를 힘차게 부딪기 시작했다.”(<파리의 우울>)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꿈꾸던 시인으로서 보들레르가 구걸하는 사람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구걸하는 사람에게 값싼 동정을 하기보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엽기적이기까지 하다. 그는 마치 오갈 데 없는 개를 패는 것처럼 구걸하는 사람에게 무자비하게 폭력을 행사했던 것이다. 보들레르 본인이 육체적으로 건강했기 때문도, 동시에 가난한 사람들을 멸시했기 때문도 아니다. 사실 그는 선천적으로 병약했을 뿐만 아니라, 생활도 궁핍했던 사람이다. 왜 그는 구걸하는 사람에게 가혹 행위를 서슴지 않았던 것일까? 그는 동전 몇 푼으로 양심을 사려는 사람도 아니다. 나아가 그는 거지를 위해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을 걱정하는 척하는 궤변가도 아니었다. 보들레르는 구걸하는 사람을 자신과 똑같은 인간으로 깨우고 싶었던 것이다.
“갑자기, 오, 기적이여! 오, 자신의 이론의 훌륭함을 검토하는 철학자의 즐거움이여! 나는 이 낡아빠진 해골이 몸을 뒤척이며, 그처럼 묘하게 고장난 기계에서 결코 가능하리라고 내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힘으로, 몸을 일으키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이 늙어빠진 불한당은 나에게 ‘좋은 징조’로 생각되는 증오에 타는 시선을 보내며 나에게 달려들어 내 눈을 멍들게 하고 이를 네 개나 부러뜨렸다. (…) 나는 그에게 말했다. “선생, 당신은 나와 동등하오! 나와 나의 돈주머니를 나누는 영광을 베풀어주시오. 그리고 당신이 진정한 박애주의자라면 당신의 동료들에게도, 그들이 당신에게 동냥을 구걸하거든, 방금 내가 마음 아프게도 당신의 등에 시도한 ‘수고’를 낳게 했던 이론을 적용시킬 것을 기억하시오.”(<파리의 우울>)
나약한 보들레르에게 일격을 받은 구걸하는 사람은 지금까지의 모든 우울과 절망의 아우라를 벗어던지게 된다.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며 그는 보들레르의 얼굴을 가격했다. 얼마나 보들레르의 행동에 모욕감을 느꼈는지, 분노한 그의 주먹은 보들레르의 눈을 멍들게 했고, 보들레르의 이를 네 개나 부러뜨렸을 정도였다. 보들레르는 바로 이 놀라운 반전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보자. 처음 만났을 때 두 사람은 서로 불평등한 처지에 있었다. 한 사람이 돈을 가지고 있다고 추정되는 사람이었다면, 다른 한 사람은 돈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제 두 사람은 동등한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서로 대면하고 있다. “네가 돈이 조금 있다고 해서, 나를 이렇게 멸시할 수는 없어. 내가 그렇게도 만만해 보이니.” 바로 이런 정신적 각성이 보들레르가 의도했던 것이다. 구걸하는 사람, 아니 이제는 보들레르와 마찬가지로 당당한 인격으로 깨어난 그에게 보들레르는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는다. “선생, 당신은 나와 등등하오!” 이어서 보들레르는 그에게 당장 필요한 돈을 받아줄 수 없냐고 간청한다. 이제 구걸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과 동등한 사람이니, 돈을 주는 것도 부탁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보들레르의 산문시를 통해 우리는 자각하게 된다. 구걸하는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모두 우리 내면에만 관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양심을 사고자 동전 몇 푼을 건넨 것도 단지 나를 위해서였고, 오만가지 요설로 적선하지 않는 것도 결국 돈을 주지 않겠다는 알량한 나의 이기심이었을 따름이기 때문이다. 어느 경우든 우리는 구걸하는 사람도 나와 마찬가지로 동등한 인격이라는 단순한 사실조차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반면 100여년 전 보들레르는 자신의 피해, 즉 육체적 상해와 금전적 손실을 무릅쓰고서라도 구걸하는 사람을 인격으로 살려내려고 노력했다. 자신이 어떻게 되든지 간에, 타인을 위해서 희생을 감내했던 시인의 속내가 눈물겹기까지 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보들레르의 방법을 모든 경우에 적용해서는 안 된다. 구걸하는 사람을 깨우기 위해서 그에게 가혹한 폭력을 행사했다고 해보자. 만일 그가 일체의 저항도 없이 폭력을 감내한다면, 보들레르의 마음을 가진 당신은 이 상황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강신주 철학자
Quote from Guest on 2022년 03월 27일, 4:00 오전
Quote from Guest on 2022년 03월 18일, 1:21 오전
오전에 오간 글들을 읽고 답글을 쓰려니 너무 길어져서 링크로 만들었습니다. 참고만 하셔요. https://brunch.co.kr/@zipnumsa/79
그나저나 저는 "슬픔이 기쁨에게" 시에 나오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마" 하는 부분을 읽을 때면 늘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에 나오는 -가난뱅이를 때리자'가 생각나요 ^^
원문: http://no-smok.net/nsmk/%EA%B0%80%EB%82%9C%EB%B1%85%EC%9D%B4%EB%A5%BC%EB%95%8C%EB%A6%AC%EC%9E%90
해석: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617479.html
가난뱅이를때리자
보들레르
나는 보름 동안이나 방안에 들어박혀서 당시(십 육칠년 전의 일이었다) 유행하고 있었던 책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즉 스물 네 시간 내에 민중을 행복하고 슬기롭고 부유하게 만드는 방법이 다루어져 있는 책들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일반 대중의 행복에 관한 그 모든 기업가들의 ㅡ 다시말하자면, 모든 가난뱅이들에게 노예가 되라고 충고하고, 가난뱅이들은 모두 왕좌에서 쫓겨난 왕이라고 설복하고 있는 사람들의 노작(勞作)을 샅샅이 소화하였다, 아니, 차라리 삼켰다고나 할까. ㅡ 그러므로 그 때 내가 혼미 또는 우둔에 가까운 정신상태에 있었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나는 다만 내 지성의 안쪽에, 내가 요즘에 사전 속에서 훑어 본, 모든 착한 여성을 위한 상투어보다는 더 훌륭한 관념이 어렴픗이 싹터옴을 느끼는 듯 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관념의 관념이요, 한없이 막연한 것에 불고하였다.
그래서 나는 심한 갈증을 느끼면서 밖으로 나왔다. 왜냐 하면, 나쁜 책을 읽는다는 이 정열적인 취미는, 그에 비례하여, 신선한 공기와 청량제를 필요하게 하기 때문이다.
내가 어느 술집에 막 들어가려고 했을 때, 거지 하나가 나에게 모자를 내밀었다. 그 눈초리야말로, 만약에 정신이 물질을 움직이고 최면술자의 눈이 포도를 익게 한다면 왕좌라도 전복시킴직한 그런 잊지 못할 눈초리였다.
동시에 나는 내 귀에 속삭이는 목소리를, 내 귀에 잘 익은 목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어디든지 나를 따라다니는 '수호신'의 목소리 또는 '수호의 악마'의 목소리였다. 소크라테스도 그의 '수호의 악마'를 가지고 있었으니, 난들 왜 '수호신'을 갖지 말라는 법이 있겠는가, 난들 왜, 소크라테스처럼, 노련한 레뤼와 신중한 바야르제가 서명한 내 광증의 증명서를 얻을 영광을 갖지 말라는 법이 있겠는가?
소크라테스의 악마와 내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잇다. 즉 소크라테스의 것은 방어하고 경고하고 금지하기 위해서 밖에는 그에게 나타나지 않았지만, 내 것은 충고하고 암시하고 설복하여 준다는 점이다. 저 가엾은 소크라테스는 금지 주의자인 '악마'밖에 안 가지고 있었지만. 내 것은 위대한 긍정주의자이며, 행동의 '악마' 또는 투쟁의 '악마'이다.
그런데 그 목소리는 나에게 이렇게 속삭이는 것이었다. '평등함을 증명하는 자만이 남과 평등하며, 자유를 정복할 수 있는 자만이 자유를 누릴 가치가 있다.'
나는 즉시 거지에게 덤벼들었다. 그의 한쪽 눈에 주먹을 한 대 먹였더니, 그 눈은 대번에 부풀어 올랐다. 그의 이를 둘 부숴 주었으나, 덕분에 나도 손톱 하나가 부러졌다. 그리고 나는 태어나기를 연약할 뿐만 아니라 권투도 잘 한다고는 할 수 없는 터인지라, 이 늙은이를 당장에 때려 죽일 만큼 기운이 세다고는 생각하지는 않았으므로, 한 손으로 그의 옷깃을 잡고, 또 한 손으로는 그의 멱살을 움켜 쥐어, 그의 머리를 힘껏 벽에 부딪치기 시작하였다. 털어 놓고 말해야겠는데, 나는 미리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아서, 이 호젓한 교외에서는, 꽤 오랫동안, 경관들의 눈에 띄지 않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해 두었던 것이다.
그런 다음, 견갑골도 부러지도록 힘껏 등을 한 대 차서, 이 기진한 육십 노인을 쓰러뜨려 놓고서, 땅에 떨어져 있는 굵은 나무가지를 집어 들고, 비프스텍을 보드랍게 하려는 요리사처럼 끈덕진 기운으로 늙은이를 두드려 팼다.
갑자기, ㅡ 오 기적이로다! 오 자기 학설의 훌륭함을 증명한 철학자의 기쁨이 바로 이러하겠지! ㅡ 이 송장같던 늙다리가, 그토록 기구하게 망그라진 기계 속에 그런 힘이 들어 있었으리라곤 상상조차도 할 수 없었던 그런 힘을 내어, 홱 몸을 돌려 벌떡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내가 이건 좋은 징조로구나 하고 생각할 만큼 원망스런 눈을 하고, 이 늙어빠진 불한당은 나에게 덤벼들어 내 두 눈을 후려치고, 이를 네개나 부러뜨리고, 같은 나무가지로 나를 북치듯 사뭇 후려팼다. ㅡ 그러니, 내 과감한 치료법으로, 나는 그에게 긍지와 생기(生氣)를 되돌려 주었던 셈이다.
그러자 나는 온갖 몸짓을 다하여, 인제 싸움이 끝난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는 것을 그에게 알리고, 스토아파의 궤변가 같은 만족을 느끼면서 일어나 그에게 말하였다, '여보, 당신은 나와 평등하오! 부디 나에게 내 지갑의 돈을 당신과 나누어 갖는 영광을 베풀어 주오.그리고 당신이 정말 박애주의자라면, 잊지말고 당신의 모든 동료들에게 적용해야만 하오, 그들이 당신에게 적선을 바라는 날엔, 내가 가슴 아프게도 당신 등 위에 시험했던 이 학설을 말이오.'
그는 내 학설을 이해했다는 것과 내 충고에 복종하겠다는 것을 나에게 똑똑히 맹세하였다.
보들레르의 파리나 우리의 서울에도 통용되는 간단한 사례를 살펴보는 것으로 보들레르 문학의 중요성은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바로 노숙자, 혹은 구걸하는 사람들이라는 풍경이다. 사실 노숙자들이 대도시의 풍경이 된 지 오래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은 공중전화 부스나 혹은 안내판을 지나치듯이 그들을 스쳐 지나가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 구걸하는 사람들은 당신의 가슴을 후비고 들어올 때가 있다. 절망 속에서 자신을 쳐다보는 멍한 눈을 보고서 마음이 동요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들의 눈은 외치는 것 같다. “같은 인간이면서 나를 도와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제 우리에게는 결단의 순간이 다가온다. 주머니를 뒤져서 동전 몇 푼이라도 그의 손에 쥐여주거나, 아니면 매몰차게 돌아서는 것이다. 적선을 통해 우리는 양심의 가책을 덜어낼 수 있다. 매몰차게 돌아서는 경우에도 우리는 자신의 양심을 달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읊조릴 수도 있을 것이다. “거지에게 적선을 하면 안 돼. 일시적으로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그는 계속 구걸을 할 테니까 말이야.”
구걸하는 사람과 눈이 마주쳤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행동이 이 두 가지밖에 없을까? 그렇지만 이 두 가지는 구걸하는 노숙자를 그대로 방치하는 냉소적인 행동에 불과하다. 영민한 보들레르는 제3의 행동, 그러니까 자본주의의 백신과도 같은 행동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내가 카바레에 들어서려고 할 때, 한 거지가 자신의 모자를 내게 내밀었다. 그런데 그의 시선은 잊을 수 없이 특별한 것이었다. 만일 정신이 물질을 움직이고 최면사의 눈이 포도들을 익게 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의 시선은 왕권을 붕괴시킬 수도 있을 것 같았다. (…) 바로 나는 거지에게 달려들었다. 단 한 번의 주먹질로 나는 그의 한 눈을 갈겼다. 눈은 순식간에 공처럼 커졌다. 그의 두 이를 부러뜨리는 데 나는 내 손톱 하나를 부러뜨렸다. 태어날 때부터 연약하며 권투에도 거의 숙달이 되지 않아, 충분히 강하지 못함을 깨달은 나는 이 늙은이를 재빨리 때리기 위해, 한 손으로는 그의 옷깃을 붙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목을 움켜쥐고 벽에 대고 그의 머리를 힘차게 부딪기 시작했다.”(<파리의 우울>)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꿈꾸던 시인으로서 보들레르가 구걸하는 사람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구걸하는 사람에게 값싼 동정을 하기보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엽기적이기까지 하다. 그는 마치 오갈 데 없는 개를 패는 것처럼 구걸하는 사람에게 무자비하게 폭력을 행사했던 것이다. 보들레르 본인이 육체적으로 건강했기 때문도, 동시에 가난한 사람들을 멸시했기 때문도 아니다. 사실 그는 선천적으로 병약했을 뿐만 아니라, 생활도 궁핍했던 사람이다. 왜 그는 구걸하는 사람에게 가혹 행위를 서슴지 않았던 것일까? 그는 동전 몇 푼으로 양심을 사려는 사람도 아니다. 나아가 그는 거지를 위해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을 걱정하는 척하는 궤변가도 아니었다. 보들레르는 구걸하는 사람을 자신과 똑같은 인간으로 깨우고 싶었던 것이다.
“갑자기, 오, 기적이여! 오, 자신의 이론의 훌륭함을 검토하는 철학자의 즐거움이여! 나는 이 낡아빠진 해골이 몸을 뒤척이며, 그처럼 묘하게 고장난 기계에서 결코 가능하리라고 내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힘으로, 몸을 일으키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이 늙어빠진 불한당은 나에게 ‘좋은 징조’로 생각되는 증오에 타는 시선을 보내며 나에게 달려들어 내 눈을 멍들게 하고 이를 네 개나 부러뜨렸다. (…) 나는 그에게 말했다. “선생, 당신은 나와 동등하오! 나와 나의 돈주머니를 나누는 영광을 베풀어주시오. 그리고 당신이 진정한 박애주의자라면 당신의 동료들에게도, 그들이 당신에게 동냥을 구걸하거든, 방금 내가 마음 아프게도 당신의 등에 시도한 ‘수고’를 낳게 했던 이론을 적용시킬 것을 기억하시오.”(<파리의 우울>)
나약한 보들레르에게 일격을 받은 구걸하는 사람은 지금까지의 모든 우울과 절망의 아우라를 벗어던지게 된다.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며 그는 보들레르의 얼굴을 가격했다. 얼마나 보들레르의 행동에 모욕감을 느꼈는지, 분노한 그의 주먹은 보들레르의 눈을 멍들게 했고, 보들레르의 이를 네 개나 부러뜨렸을 정도였다. 보들레르는 바로 이 놀라운 반전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보자. 처음 만났을 때 두 사람은 서로 불평등한 처지에 있었다. 한 사람이 돈을 가지고 있다고 추정되는 사람이었다면, 다른 한 사람은 돈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제 두 사람은 동등한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서로 대면하고 있다. “네가 돈이 조금 있다고 해서, 나를 이렇게 멸시할 수는 없어. 내가 그렇게도 만만해 보이니.” 바로 이런 정신적 각성이 보들레르가 의도했던 것이다. 구걸하는 사람, 아니 이제는 보들레르와 마찬가지로 당당한 인격으로 깨어난 그에게 보들레르는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는다. “선생, 당신은 나와 등등하오!” 이어서 보들레르는 그에게 당장 필요한 돈을 받아줄 수 없냐고 간청한다. 이제 구걸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과 동등한 사람이니, 돈을 주는 것도 부탁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보들레르의 산문시를 통해 우리는 자각하게 된다. 구걸하는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모두 우리 내면에만 관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양심을 사고자 동전 몇 푼을 건넨 것도 단지 나를 위해서였고, 오만가지 요설로 적선하지 않는 것도 결국 돈을 주지 않겠다는 알량한 나의 이기심이었을 따름이기 때문이다. 어느 경우든 우리는 구걸하는 사람도 나와 마찬가지로 동등한 인격이라는 단순한 사실조차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반면 100여년 전 보들레르는 자신의 피해, 즉 육체적 상해와 금전적 손실을 무릅쓰고서라도 구걸하는 사람을 인격으로 살려내려고 노력했다. 자신이 어떻게 되든지 간에, 타인을 위해서 희생을 감내했던 시인의 속내가 눈물겹기까지 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보들레르의 방법을 모든 경우에 적용해서는 안 된다. 구걸하는 사람을 깨우기 위해서 그에게 가혹한 폭력을 행사했다고 해보자. 만일 그가 일체의 저항도 없이 폭력을 감내한다면, 보들레르의 마음을 가진 당신은 이 상황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강신주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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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기쁨에게 -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
다음에서 인용 게스트 2022년 03월 18일, 1:20 오전(으)로선생님들, 고1국어 미래엔 교과서 쓰는 분들 계신가요.
정호승 '슬픔이 기쁨에게' (미래엔) 질문드립니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에서 '봄눈'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지도서에는 함박눈(부정적)과 대비되는 '약자를 감싸는 존재'라고 되어있는데요. 보리에 대해 찾아보니 '겨울눈은 보리를 덮어 풍년 들게 하고, 봄눈은 녹아 보리를 얼려서 흉년 들게 한다'는 속담이 있더라고요. 이런 보리의 생장을 생각하면 단순히 봄+눈이라는 단어 조합으로 따뜻하고 포근한 이미지로 시어를 읽을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오히려 봄눈이 춘궁기에 고통을 가하는 존재이고, 이것을 걷어내겠다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이 드는데요. 지도서와 참고서 등에는 모두 약자를 포근히 감싸는 긍정적인 존재로 보고 있어요.
수업하시는 선생님들의 의견이 궁금합니다.
선생님들, 고1국어 미래엔 교과서 쓰는 분들 계신가요.
정호승 '슬픔이 기쁨에게' (미래엔) 질문드립니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에서 '봄눈'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지도서에는 함박눈(부정적)과 대비되는 '약자를 감싸는 존재'라고 되어있는데요. 보리에 대해 찾아보니 '겨울눈은 보리를 덮어 풍년 들게 하고, 봄눈은 녹아 보리를 얼려서 흉년 들게 한다'는 속담이 있더라고요. 이런 보리의 생장을 생각하면 단순히 봄+눈이라는 단어 조합으로 따뜻하고 포근한 이미지로 시어를 읽을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오히려 봄눈이 춘궁기에 고통을 가하는 존재이고, 이것을 걷어내겠다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이 드는데요. 지도서와 참고서 등에는 모두 약자를 포근히 감싸는 긍정적인 존재로 보고 있어요.
수업하시는 선생님들의 의견이 궁금합니다.
다음에서 인용 게스트 2022년 03월 18일, 1:20 오전(으)로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4395854&cid=47303&categoryId=47303
저는 이 부분 참고해서 수업했습니다~
https://post.naver.com/viewer/postView.naver?volumeNo=32892373&memberNo=5246326&vType=VERTICAL
찾아보니 이런 기사도 있네요 ㅎ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4395854&cid=47303&categoryId=47303
저는 이 부분 참고해서 수업했습니다~
https://post.naver.com/viewer/postView.naver?volumeNo=32892373&memberNo=5246326&vType=VERTICAL
찾아보니 이런 기사도 있네요 ㅎ
다음에서 인용 게스트 2022년 03월 18일, 1:20 오전(으)로저는 시를 볼 때 시어의 의미는 시 전체의 맥락에서 찾아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시 자체가 절제된 언어로 많은 함축성을 가지기도 하고 작가가 새로운 의미를 창조해 내기도 하기 때문이지요
저는 시를 볼 때 시어의 의미는 시 전체의 맥락에서 찾아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시 자체가 절제된 언어로 많은 함축성을 가지기도 하고 작가가 새로운 의미를 창조해 내기도 하기 때문이지요
다음에서 인용 게스트 2022년 03월 18일, 1:20 오전(으)로나는 이제 벽을 부수지 않는다
따스하게 어루만질 뿐이다
벽이 물렁물렁해질 때까지 어루만지다가
마냥 조용히 웃을 뿐이다
웃다가 벽 속으로 걸어갈 뿐이다
벽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면
봄눈 내리는 보리밭길을 걸을 수 있고
섬과 섬 사이로 작은 배들이 고요히 떠가는
봄바다를 한없이 바라볼 수 있다정호승 시인의 다른 작품인데 작가는 봄눈에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나는 이제 벽을 부수지 않는다
따스하게 어루만질 뿐이다
벽이 물렁물렁해질 때까지 어루만지다가
마냥 조용히 웃을 뿐이다
웃다가 벽 속으로 걸어갈 뿐이다
벽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면
봄눈 내리는 보리밭길을 걸을 수 있고
섬과 섬 사이로 작은 배들이 고요히 떠가는
봄바다를 한없이 바라볼 수 있다
정호승 시인의 다른 작품인데 작가는 봄눈에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음에서 인용 게스트 2022년 03월 18일, 1:21 오전(으)로함박눈도 봄 눈도 눈이지만 '내리는'함박눈은 겨울을 의미하면서 추위, 시련 고통을 주는 존재고 그것을 보면서 힘겨운 존재들의 슬픔을 보여줌으로써 공감을 하도록 하고 '눈이 그친 눈길을 걸어가는것'은 이제 더시련이 더이상 오지는 않지만 그 상황을 함께 걸어가며 그들을 살펴보고 공감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해서 긍정적인 상황으로 이해했습니다. '봄눈'은 그 길에서 '데리고'함께 걷는 존재로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겠지요
그러면 봄눈의 의미는 긍정적으로 해석해 내야하고 ' 함박눈'처럼 거대한 시련이기 보다는 부드럽게 내려서 대지를 감싸는 존재'로 해석했습니다.여기서 말하는 봄눈은 표상적 사전적 의미의 봄눈이 아니라
맥락적, 창조적 상징의 의미입니다 따라서 봄눈을 봄눈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따뜻하게 감사주는 의미로 해석해야 합니다
함박눈도 봄 눈도 눈이지만 '내리는'함박눈은 겨울을 의미하면서 추위, 시련 고통을 주는 존재고 그것을 보면서 힘겨운 존재들의 슬픔을 보여줌으로써 공감을 하도록 하고 '눈이 그친 눈길을 걸어가는것'은 이제 더시련이 더이상 오지는 않지만 그 상황을 함께 걸어가며 그들을 살펴보고 공감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해서 긍정적인 상황으로 이해했습니다. '봄눈'은 그 길에서 '데리고'함께 걷는 존재로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겠지요
그러면 봄눈의 의미는 긍정적으로 해석해 내야하고 ' 함박눈'처럼 거대한 시련이기 보다는 부드럽게 내려서 대지를 감싸는 존재'로 해석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봄눈은 표상적 사전적 의미의 봄눈이 아니라
맥락적, 창조적 상징의 의미입니다 따라서 봄눈을 봄눈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따뜻하게 감사주는 의미로 해석해야 합니다
다음에서 인용 게스트 2022년 03월 18일, 1:21 오전(으)로다들 좋은 말씀 해 주셨네요.
맨마지막에 답해주신 선생님의
"-해석해야 합니다"는
"본인은 그렇게 해석합니다"로 받아들이시면 좋겠습니다.
선생님의 맨 처음 접근법도 틀리지 않았습니다.
다들 좋은 말씀 해 주셨네요.
맨마지막에 답해주신 선생님의
"-해석해야 합니다"는
"본인은 그렇게 해석합니다"로 받아들이시면 좋겠습니다.
선생님의 맨 처음 접근법도 틀리지 않았습니다.
다음에서 인용 게스트 2022년 03월 18일, 1:21 오전(으)로오전에 오간 글들을 읽고 답글을 쓰려니 너무 길어져서 링크로 만들었습니다. 참고만 하셔요. https://brunch.co.kr/@zipnumsa/79
그나저나 저는 "슬픔이 기쁨에게" 시에 나오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마" 하는 부분을 읽을 때면 늘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에 나오는 -가난뱅이를 때리자'가 생각나요 ^^
원문: http://no-smok.net/nsmk/%EA%B0%80%EB%82%9C%EB%B1%85%EC%9D%B4%EB%A5%BC%EB%95%8C%EB%A6%AC%EC%9E%90
해석: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617479.html
오전에 오간 글들을 읽고 답글을 쓰려니 너무 길어져서 링크로 만들었습니다. 참고만 하셔요. https://brunch.co.kr/@zipnumsa/79
그나저나 저는 "슬픔이 기쁨에게" 시에 나오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마" 하는 부분을 읽을 때면 늘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에 나오는 -가난뱅이를 때리자'가 생각나요 ^^
원문: http://no-smok.net/nsmk/%EA%B0%80%EB%82%9C%EB%B1%85%EC%9D%B4%EB%A5%BC%EB%95%8C%EB%A6%AC%EC%9E%90
해석: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617479.html
다음에서 인용 게스트 2022년 03월 27일, 4:00 오전(으)로Quote from Guest on 2022년 03월 18일, 1:21 오전오전에 오간 글들을 읽고 답글을 쓰려니 너무 길어져서 링크로 만들었습니다. 참고만 하셔요. https://brunch.co.kr/@zipnumsa/79
그나저나 저는 "슬픔이 기쁨에게" 시에 나오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마" 하는 부분을 읽을 때면 늘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에 나오는 -가난뱅이를 때리자'가 생각나요 ^^
원문: http://no-smok.net/nsmk/%EA%B0%80%EB%82%9C%EB%B1%85%EC%9D%B4%EB%A5%BC%EB%95%8C%EB%A6%AC%EC%9E%90
해석: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617479.html가난뱅이를때리자
보들레르나는 보름 동안이나 방안에 들어박혀서 당시(십 육칠년 전의 일이었다) 유행하고 있었던 책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즉 스물 네 시간 내에 민중을 행복하고 슬기롭고 부유하게 만드는 방법이 다루어져 있는 책들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일반 대중의 행복에 관한 그 모든 기업가들의 ㅡ 다시말하자면, 모든 가난뱅이들에게 노예가 되라고 충고하고, 가난뱅이들은 모두 왕좌에서 쫓겨난 왕이라고 설복하고 있는 사람들의 노작(勞作)을 샅샅이 소화하였다, 아니, 차라리 삼켰다고나 할까. ㅡ 그러므로 그 때 내가 혼미 또는 우둔에 가까운 정신상태에 있었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나는 다만 내 지성의 안쪽에, 내가 요즘에 사전 속에서 훑어 본, 모든 착한 여성을 위한 상투어보다는 더 훌륭한 관념이 어렴픗이 싹터옴을 느끼는 듯 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관념의 관념이요, 한없이 막연한 것에 불고하였다.
그래서 나는 심한 갈증을 느끼면서 밖으로 나왔다. 왜냐 하면, 나쁜 책을 읽는다는 이 정열적인 취미는, 그에 비례하여, 신선한 공기와 청량제를 필요하게 하기 때문이다.
내가 어느 술집에 막 들어가려고 했을 때, 거지 하나가 나에게 모자를 내밀었다. 그 눈초리야말로, 만약에 정신이 물질을 움직이고 최면술자의 눈이 포도를 익게 한다면 왕좌라도 전복시킴직한 그런 잊지 못할 눈초리였다.
동시에 나는 내 귀에 속삭이는 목소리를, 내 귀에 잘 익은 목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어디든지 나를 따라다니는 '수호신'의 목소리 또는 '수호의 악마'의 목소리였다. 소크라테스도 그의 '수호의 악마'를 가지고 있었으니, 난들 왜 '수호신'을 갖지 말라는 법이 있겠는가, 난들 왜, 소크라테스처럼, 노련한 레뤼와 신중한 바야르제가 서명한 내 광증의 증명서를 얻을 영광을 갖지 말라는 법이 있겠는가?
소크라테스의 악마와 내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잇다. 즉 소크라테스의 것은 방어하고 경고하고 금지하기 위해서 밖에는 그에게 나타나지 않았지만, 내 것은 충고하고 암시하고 설복하여 준다는 점이다. 저 가엾은 소크라테스는 금지 주의자인 '악마'밖에 안 가지고 있었지만. 내 것은 위대한 긍정주의자이며, 행동의 '악마' 또는 투쟁의 '악마'이다.
그런데 그 목소리는 나에게 이렇게 속삭이는 것이었다. '평등함을 증명하는 자만이 남과 평등하며, 자유를 정복할 수 있는 자만이 자유를 누릴 가치가 있다.'
나는 즉시 거지에게 덤벼들었다. 그의 한쪽 눈에 주먹을 한 대 먹였더니, 그 눈은 대번에 부풀어 올랐다. 그의 이를 둘 부숴 주었으나, 덕분에 나도 손톱 하나가 부러졌다. 그리고 나는 태어나기를 연약할 뿐만 아니라 권투도 잘 한다고는 할 수 없는 터인지라, 이 늙은이를 당장에 때려 죽일 만큼 기운이 세다고는 생각하지는 않았으므로, 한 손으로 그의 옷깃을 잡고, 또 한 손으로는 그의 멱살을 움켜 쥐어, 그의 머리를 힘껏 벽에 부딪치기 시작하였다. 털어 놓고 말해야겠는데, 나는 미리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아서, 이 호젓한 교외에서는, 꽤 오랫동안, 경관들의 눈에 띄지 않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해 두었던 것이다.
그런 다음, 견갑골도 부러지도록 힘껏 등을 한 대 차서, 이 기진한 육십 노인을 쓰러뜨려 놓고서, 땅에 떨어져 있는 굵은 나무가지를 집어 들고, 비프스텍을 보드랍게 하려는 요리사처럼 끈덕진 기운으로 늙은이를 두드려 팼다.
갑자기, ㅡ 오 기적이로다! 오 자기 학설의 훌륭함을 증명한 철학자의 기쁨이 바로 이러하겠지! ㅡ 이 송장같던 늙다리가, 그토록 기구하게 망그라진 기계 속에 그런 힘이 들어 있었으리라곤 상상조차도 할 수 없었던 그런 힘을 내어, 홱 몸을 돌려 벌떡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내가 이건 좋은 징조로구나 하고 생각할 만큼 원망스런 눈을 하고, 이 늙어빠진 불한당은 나에게 덤벼들어 내 두 눈을 후려치고, 이를 네개나 부러뜨리고, 같은 나무가지로 나를 북치듯 사뭇 후려팼다. ㅡ 그러니, 내 과감한 치료법으로, 나는 그에게 긍지와 생기(生氣)를 되돌려 주었던 셈이다.
그러자 나는 온갖 몸짓을 다하여, 인제 싸움이 끝난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는 것을 그에게 알리고, 스토아파의 궤변가 같은 만족을 느끼면서 일어나 그에게 말하였다, '여보, 당신은 나와 평등하오! 부디 나에게 내 지갑의 돈을 당신과 나누어 갖는 영광을 베풀어 주오.그리고 당신이 정말 박애주의자라면, 잊지말고 당신의 모든 동료들에게 적용해야만 하오, 그들이 당신에게 적선을 바라는 날엔, 내가 가슴 아프게도 당신 등 위에 시험했던 이 학설을 말이오.'
그는 내 학설을 이해했다는 것과 내 충고에 복종하겠다는 것을 나에게 똑똑히 맹세하였다.
Quote from Guest on 2022년 03월 18일, 1:21 오전오전에 오간 글들을 읽고 답글을 쓰려니 너무 길어져서 링크로 만들었습니다. 참고만 하셔요. https://brunch.co.kr/@zipnumsa/79
그나저나 저는 "슬픔이 기쁨에게" 시에 나오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마" 하는 부분을 읽을 때면 늘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에 나오는 -가난뱅이를 때리자'가 생각나요 ^^
원문: http://no-smok.net/nsmk/%EA%B0%80%EB%82%9C%EB%B1%85%EC%9D%B4%EB%A5%BC%EB%95%8C%EB%A6%AC%EC%9E%90
해석: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617479.html
나는 보름 동안이나 방안에 들어박혀서 당시(십 육칠년 전의 일이었다) 유행하고 있었던 책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즉 스물 네 시간 내에 민중을 행복하고 슬기롭고 부유하게 만드는 방법이 다루어져 있는 책들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일반 대중의 행복에 관한 그 모든 기업가들의 ㅡ 다시말하자면, 모든 가난뱅이들에게 노예가 되라고 충고하고, 가난뱅이들은 모두 왕좌에서 쫓겨난 왕이라고 설복하고 있는 사람들의 노작(勞作)을 샅샅이 소화하였다, 아니, 차라리 삼켰다고나 할까. ㅡ 그러므로 그 때 내가 혼미 또는 우둔에 가까운 정신상태에 있었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다음에서 인용 게스트 2022년 03월 27일, 4:02 오전(으)로Quote from Guest on 2022년 03월 27일, 4:00 오전Quote from Guest on 2022년 03월 18일, 1:21 오전오전에 오간 글들을 읽고 답글을 쓰려니 너무 길어져서 링크로 만들었습니다. 참고만 하셔요. https://brunch.co.kr/@zipnumsa/79
그나저나 저는 "슬픔이 기쁨에게" 시에 나오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마" 하는 부분을 읽을 때면 늘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에 나오는 -가난뱅이를 때리자'가 생각나요 ^^
원문: http://no-smok.net/nsmk/%EA%B0%80%EB%82%9C%EB%B1%85%EC%9D%B4%EB%A5%BC%EB%95%8C%EB%A6%AC%EC%9E%90
해석: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617479.html가난뱅이를때리자
보들레르나는 보름 동안이나 방안에 들어박혀서 당시(십 육칠년 전의 일이었다) 유행하고 있었던 책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즉 스물 네 시간 내에 민중을 행복하고 슬기롭고 부유하게 만드는 방법이 다루어져 있는 책들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일반 대중의 행복에 관한 그 모든 기업가들의 ㅡ 다시말하자면, 모든 가난뱅이들에게 노예가 되라고 충고하고, 가난뱅이들은 모두 왕좌에서 쫓겨난 왕이라고 설복하고 있는 사람들의 노작(勞作)을 샅샅이 소화하였다, 아니, 차라리 삼켰다고나 할까. ㅡ 그러므로 그 때 내가 혼미 또는 우둔에 가까운 정신상태에 있었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나는 다만 내 지성의 안쪽에, 내가 요즘에 사전 속에서 훑어 본, 모든 착한 여성을 위한 상투어보다는 더 훌륭한 관념이 어렴픗이 싹터옴을 느끼는 듯 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관념의 관념이요, 한없이 막연한 것에 불고하였다.
그래서 나는 심한 갈증을 느끼면서 밖으로 나왔다. 왜냐 하면, 나쁜 책을 읽는다는 이 정열적인 취미는, 그에 비례하여, 신선한 공기와 청량제를 필요하게 하기 때문이다.
내가 어느 술집에 막 들어가려고 했을 때, 거지 하나가 나에게 모자를 내밀었다. 그 눈초리야말로, 만약에 정신이 물질을 움직이고 최면술자의 눈이 포도를 익게 한다면 왕좌라도 전복시킴직한 그런 잊지 못할 눈초리였다.
동시에 나는 내 귀에 속삭이는 목소리를, 내 귀에 잘 익은 목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어디든지 나를 따라다니는 '수호신'의 목소리 또는 '수호의 악마'의 목소리였다. 소크라테스도 그의 '수호의 악마'를 가지고 있었으니, 난들 왜 '수호신'을 갖지 말라는 법이 있겠는가, 난들 왜, 소크라테스처럼, 노련한 레뤼와 신중한 바야르제가 서명한 내 광증의 증명서를 얻을 영광을 갖지 말라는 법이 있겠는가?
소크라테스의 악마와 내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잇다. 즉 소크라테스의 것은 방어하고 경고하고 금지하기 위해서 밖에는 그에게 나타나지 않았지만, 내 것은 충고하고 암시하고 설복하여 준다는 점이다. 저 가엾은 소크라테스는 금지 주의자인 '악마'밖에 안 가지고 있었지만. 내 것은 위대한 긍정주의자이며, 행동의 '악마' 또는 투쟁의 '악마'이다.
그런데 그 목소리는 나에게 이렇게 속삭이는 것이었다. '평등함을 증명하는 자만이 남과 평등하며, 자유를 정복할 수 있는 자만이 자유를 누릴 가치가 있다.'
나는 즉시 거지에게 덤벼들었다. 그의 한쪽 눈에 주먹을 한 대 먹였더니, 그 눈은 대번에 부풀어 올랐다. 그의 이를 둘 부숴 주었으나, 덕분에 나도 손톱 하나가 부러졌다. 그리고 나는 태어나기를 연약할 뿐만 아니라 권투도 잘 한다고는 할 수 없는 터인지라, 이 늙은이를 당장에 때려 죽일 만큼 기운이 세다고는 생각하지는 않았으므로, 한 손으로 그의 옷깃을 잡고, 또 한 손으로는 그의 멱살을 움켜 쥐어, 그의 머리를 힘껏 벽에 부딪치기 시작하였다. 털어 놓고 말해야겠는데, 나는 미리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아서, 이 호젓한 교외에서는, 꽤 오랫동안, 경관들의 눈에 띄지 않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해 두었던 것이다.
그런 다음, 견갑골도 부러지도록 힘껏 등을 한 대 차서, 이 기진한 육십 노인을 쓰러뜨려 놓고서, 땅에 떨어져 있는 굵은 나무가지를 집어 들고, 비프스텍을 보드랍게 하려는 요리사처럼 끈덕진 기운으로 늙은이를 두드려 팼다.
갑자기, ㅡ 오 기적이로다! 오 자기 학설의 훌륭함을 증명한 철학자의 기쁨이 바로 이러하겠지! ㅡ 이 송장같던 늙다리가, 그토록 기구하게 망그라진 기계 속에 그런 힘이 들어 있었으리라곤 상상조차도 할 수 없었던 그런 힘을 내어, 홱 몸을 돌려 벌떡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내가 이건 좋은 징조로구나 하고 생각할 만큼 원망스런 눈을 하고, 이 늙어빠진 불한당은 나에게 덤벼들어 내 두 눈을 후려치고, 이를 네개나 부러뜨리고, 같은 나무가지로 나를 북치듯 사뭇 후려팼다. ㅡ 그러니, 내 과감한 치료법으로, 나는 그에게 긍지와 생기(生氣)를 되돌려 주었던 셈이다.
그러자 나는 온갖 몸짓을 다하여, 인제 싸움이 끝난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는 것을 그에게 알리고, 스토아파의 궤변가 같은 만족을 느끼면서 일어나 그에게 말하였다, '여보, 당신은 나와 평등하오! 부디 나에게 내 지갑의 돈을 당신과 나누어 갖는 영광을 베풀어 주오.그리고 당신이 정말 박애주의자라면, 잊지말고 당신의 모든 동료들에게 적용해야만 하오, 그들이 당신에게 적선을 바라는 날엔, 내가 가슴 아프게도 당신 등 위에 시험했던 이 학설을 말이오.'
그는 내 학설을 이해했다는 것과 내 충고에 복종하겠다는 것을 나에게 똑똑히 맹세하였다.보들레르의 파리나 우리의 서울에도 통용되는 간단한 사례를 살펴보는 것으로 보들레르 문학의 중요성은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바로 노숙자, 혹은 구걸하는 사람들이라는 풍경이다. 사실 노숙자들이 대도시의 풍경이 된 지 오래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은 공중전화 부스나 혹은 안내판을 지나치듯이 그들을 스쳐 지나가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 구걸하는 사람들은 당신의 가슴을 후비고 들어올 때가 있다. 절망 속에서 자신을 쳐다보는 멍한 눈을 보고서 마음이 동요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들의 눈은 외치는 것 같다. “같은 인간이면서 나를 도와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제 우리에게는 결단의 순간이 다가온다. 주머니를 뒤져서 동전 몇 푼이라도 그의 손에 쥐여주거나, 아니면 매몰차게 돌아서는 것이다. 적선을 통해 우리는 양심의 가책을 덜어낼 수 있다. 매몰차게 돌아서는 경우에도 우리는 자신의 양심을 달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읊조릴 수도 있을 것이다. “거지에게 적선을 하면 안 돼. 일시적으로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그는 계속 구걸을 할 테니까 말이야.”
구걸하는 사람과 눈이 마주쳤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행동이 이 두 가지밖에 없을까? 그렇지만 이 두 가지는 구걸하는 노숙자를 그대로 방치하는 냉소적인 행동에 불과하다. 영민한 보들레르는 제3의 행동, 그러니까 자본주의의 백신과도 같은 행동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내가 카바레에 들어서려고 할 때, 한 거지가 자신의 모자를 내게 내밀었다. 그런데 그의 시선은 잊을 수 없이 특별한 것이었다. 만일 정신이 물질을 움직이고 최면사의 눈이 포도들을 익게 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의 시선은 왕권을 붕괴시킬 수도 있을 것 같았다. (…) 바로 나는 거지에게 달려들었다. 단 한 번의 주먹질로 나는 그의 한 눈을 갈겼다. 눈은 순식간에 공처럼 커졌다. 그의 두 이를 부러뜨리는 데 나는 내 손톱 하나를 부러뜨렸다. 태어날 때부터 연약하며 권투에도 거의 숙달이 되지 않아, 충분히 강하지 못함을 깨달은 나는 이 늙은이를 재빨리 때리기 위해, 한 손으로는 그의 옷깃을 붙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목을 움켜쥐고 벽에 대고 그의 머리를 힘차게 부딪기 시작했다.”(<파리의 우울>)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꿈꾸던 시인으로서 보들레르가 구걸하는 사람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구걸하는 사람에게 값싼 동정을 하기보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엽기적이기까지 하다. 그는 마치 오갈 데 없는 개를 패는 것처럼 구걸하는 사람에게 무자비하게 폭력을 행사했던 것이다. 보들레르 본인이 육체적으로 건강했기 때문도, 동시에 가난한 사람들을 멸시했기 때문도 아니다. 사실 그는 선천적으로 병약했을 뿐만 아니라, 생활도 궁핍했던 사람이다. 왜 그는 구걸하는 사람에게 가혹 행위를 서슴지 않았던 것일까? 그는 동전 몇 푼으로 양심을 사려는 사람도 아니다. 나아가 그는 거지를 위해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을 걱정하는 척하는 궤변가도 아니었다. 보들레르는 구걸하는 사람을 자신과 똑같은 인간으로 깨우고 싶었던 것이다.
“갑자기, 오, 기적이여! 오, 자신의 이론의 훌륭함을 검토하는 철학자의 즐거움이여! 나는 이 낡아빠진 해골이 몸을 뒤척이며, 그처럼 묘하게 고장난 기계에서 결코 가능하리라고 내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힘으로, 몸을 일으키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이 늙어빠진 불한당은 나에게 ‘좋은 징조’로 생각되는 증오에 타는 시선을 보내며 나에게 달려들어 내 눈을 멍들게 하고 이를 네 개나 부러뜨렸다. (…) 나는 그에게 말했다. “선생, 당신은 나와 동등하오! 나와 나의 돈주머니를 나누는 영광을 베풀어주시오. 그리고 당신이 진정한 박애주의자라면 당신의 동료들에게도, 그들이 당신에게 동냥을 구걸하거든, 방금 내가 마음 아프게도 당신의 등에 시도한 ‘수고’를 낳게 했던 이론을 적용시킬 것을 기억하시오.”(<파리의 우울>)
나약한 보들레르에게 일격을 받은 구걸하는 사람은 지금까지의 모든 우울과 절망의 아우라를 벗어던지게 된다.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며 그는 보들레르의 얼굴을 가격했다. 얼마나 보들레르의 행동에 모욕감을 느꼈는지, 분노한 그의 주먹은 보들레르의 눈을 멍들게 했고, 보들레르의 이를 네 개나 부러뜨렸을 정도였다. 보들레르는 바로 이 놀라운 반전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보자. 처음 만났을 때 두 사람은 서로 불평등한 처지에 있었다. 한 사람이 돈을 가지고 있다고 추정되는 사람이었다면, 다른 한 사람은 돈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제 두 사람은 동등한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서로 대면하고 있다. “네가 돈이 조금 있다고 해서, 나를 이렇게 멸시할 수는 없어. 내가 그렇게도 만만해 보이니.” 바로 이런 정신적 각성이 보들레르가 의도했던 것이다. 구걸하는 사람, 아니 이제는 보들레르와 마찬가지로 당당한 인격으로 깨어난 그에게 보들레르는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는다. “선생, 당신은 나와 등등하오!” 이어서 보들레르는 그에게 당장 필요한 돈을 받아줄 수 없냐고 간청한다. 이제 구걸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과 동등한 사람이니, 돈을 주는 것도 부탁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보들레르의 산문시를 통해 우리는 자각하게 된다. 구걸하는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모두 우리 내면에만 관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양심을 사고자 동전 몇 푼을 건넨 것도 단지 나를 위해서였고, 오만가지 요설로 적선하지 않는 것도 결국 돈을 주지 않겠다는 알량한 나의 이기심이었을 따름이기 때문이다. 어느 경우든 우리는 구걸하는 사람도 나와 마찬가지로 동등한 인격이라는 단순한 사실조차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반면 100여년 전 보들레르는 자신의 피해, 즉 육체적 상해와 금전적 손실을 무릅쓰고서라도 구걸하는 사람을 인격으로 살려내려고 노력했다. 자신이 어떻게 되든지 간에, 타인을 위해서 희생을 감내했던 시인의 속내가 눈물겹기까지 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보들레르의 방법을 모든 경우에 적용해서는 안 된다. 구걸하는 사람을 깨우기 위해서 그에게 가혹한 폭력을 행사했다고 해보자. 만일 그가 일체의 저항도 없이 폭력을 감내한다면, 보들레르의 마음을 가진 당신은 이 상황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강신주 철학자
Quote from Guest on 2022년 03월 27일, 4:00 오전Quote from Guest on 2022년 03월 18일, 1:21 오전오전에 오간 글들을 읽고 답글을 쓰려니 너무 길어져서 링크로 만들었습니다. 참고만 하셔요. https://brunch.co.kr/@zipnumsa/79
그나저나 저는 "슬픔이 기쁨에게" 시에 나오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마" 하는 부분을 읽을 때면 늘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에 나오는 -가난뱅이를 때리자'가 생각나요 ^^
원문: http://no-smok.net/nsmk/%EA%B0%80%EB%82%9C%EB%B1%85%EC%9D%B4%EB%A5%BC%EB%95%8C%EB%A6%AC%EC%9E%90
해석: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617479.html가난뱅이를때리자
보들레르나는 보름 동안이나 방안에 들어박혀서 당시(십 육칠년 전의 일이었다) 유행하고 있었던 책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즉 스물 네 시간 내에 민중을 행복하고 슬기롭고 부유하게 만드는 방법이 다루어져 있는 책들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일반 대중의 행복에 관한 그 모든 기업가들의 ㅡ 다시말하자면, 모든 가난뱅이들에게 노예가 되라고 충고하고, 가난뱅이들은 모두 왕좌에서 쫓겨난 왕이라고 설복하고 있는 사람들의 노작(勞作)을 샅샅이 소화하였다, 아니, 차라리 삼켰다고나 할까. ㅡ 그러므로 그 때 내가 혼미 또는 우둔에 가까운 정신상태에 있었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나는 다만 내 지성의 안쪽에, 내가 요즘에 사전 속에서 훑어 본, 모든 착한 여성을 위한 상투어보다는 더 훌륭한 관념이 어렴픗이 싹터옴을 느끼는 듯 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관념의 관념이요, 한없이 막연한 것에 불고하였다.
그래서 나는 심한 갈증을 느끼면서 밖으로 나왔다. 왜냐 하면, 나쁜 책을 읽는다는 이 정열적인 취미는, 그에 비례하여, 신선한 공기와 청량제를 필요하게 하기 때문이다.
내가 어느 술집에 막 들어가려고 했을 때, 거지 하나가 나에게 모자를 내밀었다. 그 눈초리야말로, 만약에 정신이 물질을 움직이고 최면술자의 눈이 포도를 익게 한다면 왕좌라도 전복시킴직한 그런 잊지 못할 눈초리였다.
동시에 나는 내 귀에 속삭이는 목소리를, 내 귀에 잘 익은 목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어디든지 나를 따라다니는 '수호신'의 목소리 또는 '수호의 악마'의 목소리였다. 소크라테스도 그의 '수호의 악마'를 가지고 있었으니, 난들 왜 '수호신'을 갖지 말라는 법이 있겠는가, 난들 왜, 소크라테스처럼, 노련한 레뤼와 신중한 바야르제가 서명한 내 광증의 증명서를 얻을 영광을 갖지 말라는 법이 있겠는가?
소크라테스의 악마와 내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잇다. 즉 소크라테스의 것은 방어하고 경고하고 금지하기 위해서 밖에는 그에게 나타나지 않았지만, 내 것은 충고하고 암시하고 설복하여 준다는 점이다. 저 가엾은 소크라테스는 금지 주의자인 '악마'밖에 안 가지고 있었지만. 내 것은 위대한 긍정주의자이며, 행동의 '악마' 또는 투쟁의 '악마'이다.
그런데 그 목소리는 나에게 이렇게 속삭이는 것이었다. '평등함을 증명하는 자만이 남과 평등하며, 자유를 정복할 수 있는 자만이 자유를 누릴 가치가 있다.'
나는 즉시 거지에게 덤벼들었다. 그의 한쪽 눈에 주먹을 한 대 먹였더니, 그 눈은 대번에 부풀어 올랐다. 그의 이를 둘 부숴 주었으나, 덕분에 나도 손톱 하나가 부러졌다. 그리고 나는 태어나기를 연약할 뿐만 아니라 권투도 잘 한다고는 할 수 없는 터인지라, 이 늙은이를 당장에 때려 죽일 만큼 기운이 세다고는 생각하지는 않았으므로, 한 손으로 그의 옷깃을 잡고, 또 한 손으로는 그의 멱살을 움켜 쥐어, 그의 머리를 힘껏 벽에 부딪치기 시작하였다. 털어 놓고 말해야겠는데, 나는 미리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아서, 이 호젓한 교외에서는, 꽤 오랫동안, 경관들의 눈에 띄지 않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해 두었던 것이다.
그런 다음, 견갑골도 부러지도록 힘껏 등을 한 대 차서, 이 기진한 육십 노인을 쓰러뜨려 놓고서, 땅에 떨어져 있는 굵은 나무가지를 집어 들고, 비프스텍을 보드랍게 하려는 요리사처럼 끈덕진 기운으로 늙은이를 두드려 팼다.
갑자기, ㅡ 오 기적이로다! 오 자기 학설의 훌륭함을 증명한 철학자의 기쁨이 바로 이러하겠지! ㅡ 이 송장같던 늙다리가, 그토록 기구하게 망그라진 기계 속에 그런 힘이 들어 있었으리라곤 상상조차도 할 수 없었던 그런 힘을 내어, 홱 몸을 돌려 벌떡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내가 이건 좋은 징조로구나 하고 생각할 만큼 원망스런 눈을 하고, 이 늙어빠진 불한당은 나에게 덤벼들어 내 두 눈을 후려치고, 이를 네개나 부러뜨리고, 같은 나무가지로 나를 북치듯 사뭇 후려팼다. ㅡ 그러니, 내 과감한 치료법으로, 나는 그에게 긍지와 생기(生氣)를 되돌려 주었던 셈이다.
그러자 나는 온갖 몸짓을 다하여, 인제 싸움이 끝난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는 것을 그에게 알리고, 스토아파의 궤변가 같은 만족을 느끼면서 일어나 그에게 말하였다, '여보, 당신은 나와 평등하오! 부디 나에게 내 지갑의 돈을 당신과 나누어 갖는 영광을 베풀어 주오.그리고 당신이 정말 박애주의자라면, 잊지말고 당신의 모든 동료들에게 적용해야만 하오, 그들이 당신에게 적선을 바라는 날엔, 내가 가슴 아프게도 당신 등 위에 시험했던 이 학설을 말이오.'
그는 내 학설을 이해했다는 것과 내 충고에 복종하겠다는 것을 나에게 똑똑히 맹세하였다.
보들레르의 파리나 우리의 서울에도 통용되는 간단한 사례를 살펴보는 것으로 보들레르 문학의 중요성은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바로 노숙자, 혹은 구걸하는 사람들이라는 풍경이다. 사실 노숙자들이 대도시의 풍경이 된 지 오래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은 공중전화 부스나 혹은 안내판을 지나치듯이 그들을 스쳐 지나가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 구걸하는 사람들은 당신의 가슴을 후비고 들어올 때가 있다. 절망 속에서 자신을 쳐다보는 멍한 눈을 보고서 마음이 동요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들의 눈은 외치는 것 같다. “같은 인간이면서 나를 도와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제 우리에게는 결단의 순간이 다가온다. 주머니를 뒤져서 동전 몇 푼이라도 그의 손에 쥐여주거나, 아니면 매몰차게 돌아서는 것이다. 적선을 통해 우리는 양심의 가책을 덜어낼 수 있다. 매몰차게 돌아서는 경우에도 우리는 자신의 양심을 달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읊조릴 수도 있을 것이다. “거지에게 적선을 하면 안 돼. 일시적으로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그는 계속 구걸을 할 테니까 말이야.”
구걸하는 사람과 눈이 마주쳤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행동이 이 두 가지밖에 없을까? 그렇지만 이 두 가지는 구걸하는 노숙자를 그대로 방치하는 냉소적인 행동에 불과하다. 영민한 보들레르는 제3의 행동, 그러니까 자본주의의 백신과도 같은 행동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내가 카바레에 들어서려고 할 때, 한 거지가 자신의 모자를 내게 내밀었다. 그런데 그의 시선은 잊을 수 없이 특별한 것이었다. 만일 정신이 물질을 움직이고 최면사의 눈이 포도들을 익게 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의 시선은 왕권을 붕괴시킬 수도 있을 것 같았다. (…) 바로 나는 거지에게 달려들었다. 단 한 번의 주먹질로 나는 그의 한 눈을 갈겼다. 눈은 순식간에 공처럼 커졌다. 그의 두 이를 부러뜨리는 데 나는 내 손톱 하나를 부러뜨렸다. 태어날 때부터 연약하며 권투에도 거의 숙달이 되지 않아, 충분히 강하지 못함을 깨달은 나는 이 늙은이를 재빨리 때리기 위해, 한 손으로는 그의 옷깃을 붙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목을 움켜쥐고 벽에 대고 그의 머리를 힘차게 부딪기 시작했다.”(<파리의 우울>)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꿈꾸던 시인으로서 보들레르가 구걸하는 사람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구걸하는 사람에게 값싼 동정을 하기보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엽기적이기까지 하다. 그는 마치 오갈 데 없는 개를 패는 것처럼 구걸하는 사람에게 무자비하게 폭력을 행사했던 것이다. 보들레르 본인이 육체적으로 건강했기 때문도, 동시에 가난한 사람들을 멸시했기 때문도 아니다. 사실 그는 선천적으로 병약했을 뿐만 아니라, 생활도 궁핍했던 사람이다. 왜 그는 구걸하는 사람에게 가혹 행위를 서슴지 않았던 것일까? 그는 동전 몇 푼으로 양심을 사려는 사람도 아니다. 나아가 그는 거지를 위해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을 걱정하는 척하는 궤변가도 아니었다. 보들레르는 구걸하는 사람을 자신과 똑같은 인간으로 깨우고 싶었던 것이다.
“갑자기, 오, 기적이여! 오, 자신의 이론의 훌륭함을 검토하는 철학자의 즐거움이여! 나는 이 낡아빠진 해골이 몸을 뒤척이며, 그처럼 묘하게 고장난 기계에서 결코 가능하리라고 내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힘으로, 몸을 일으키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이 늙어빠진 불한당은 나에게 ‘좋은 징조’로 생각되는 증오에 타는 시선을 보내며 나에게 달려들어 내 눈을 멍들게 하고 이를 네 개나 부러뜨렸다. (…) 나는 그에게 말했다. “선생, 당신은 나와 동등하오! 나와 나의 돈주머니를 나누는 영광을 베풀어주시오. 그리고 당신이 진정한 박애주의자라면 당신의 동료들에게도, 그들이 당신에게 동냥을 구걸하거든, 방금 내가 마음 아프게도 당신의 등에 시도한 ‘수고’를 낳게 했던 이론을 적용시킬 것을 기억하시오.”(<파리의 우울>)
나약한 보들레르에게 일격을 받은 구걸하는 사람은 지금까지의 모든 우울과 절망의 아우라를 벗어던지게 된다.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며 그는 보들레르의 얼굴을 가격했다. 얼마나 보들레르의 행동에 모욕감을 느꼈는지, 분노한 그의 주먹은 보들레르의 눈을 멍들게 했고, 보들레르의 이를 네 개나 부러뜨렸을 정도였다. 보들레르는 바로 이 놀라운 반전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보자. 처음 만났을 때 두 사람은 서로 불평등한 처지에 있었다. 한 사람이 돈을 가지고 있다고 추정되는 사람이었다면, 다른 한 사람은 돈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제 두 사람은 동등한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서로 대면하고 있다. “네가 돈이 조금 있다고 해서, 나를 이렇게 멸시할 수는 없어. 내가 그렇게도 만만해 보이니.” 바로 이런 정신적 각성이 보들레르가 의도했던 것이다. 구걸하는 사람, 아니 이제는 보들레르와 마찬가지로 당당한 인격으로 깨어난 그에게 보들레르는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는다. “선생, 당신은 나와 등등하오!” 이어서 보들레르는 그에게 당장 필요한 돈을 받아줄 수 없냐고 간청한다. 이제 구걸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과 동등한 사람이니, 돈을 주는 것도 부탁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보들레르의 산문시를 통해 우리는 자각하게 된다. 구걸하는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모두 우리 내면에만 관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양심을 사고자 동전 몇 푼을 건넨 것도 단지 나를 위해서였고, 오만가지 요설로 적선하지 않는 것도 결국 돈을 주지 않겠다는 알량한 나의 이기심이었을 따름이기 때문이다. 어느 경우든 우리는 구걸하는 사람도 나와 마찬가지로 동등한 인격이라는 단순한 사실조차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반면 100여년 전 보들레르는 자신의 피해, 즉 육체적 상해와 금전적 손실을 무릅쓰고서라도 구걸하는 사람을 인격으로 살려내려고 노력했다. 자신이 어떻게 되든지 간에, 타인을 위해서 희생을 감내했던 시인의 속내가 눈물겹기까지 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보들레르의 방법을 모든 경우에 적용해서는 안 된다. 구걸하는 사람을 깨우기 위해서 그에게 가혹한 폭력을 행사했다고 해보자. 만일 그가 일체의 저항도 없이 폭력을 감내한다면, 보들레르의 마음을 가진 당신은 이 상황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