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ote from: 익명 on Apr 09, 2023, 04:27 PM고등학생들이나 임용수험생들이 '역설적'에 대해 물을 때가 있습니다. 흔히 '역설' 말고 '역설적'이라고 할 때는, 작품의 표면 의미과 심층 의미가 다를 때를 가리킵니다. 예를 들어, 흥부전을 읽으면 마지막에 박에서 보물이 튀어 나와 부자가 됩니다. 표면 의미는 흥부가 부자가 된 거겠죠. 하지만 심층 의미는, "이러한 판타지에 기대지 않으면 현실에서는 도저히, 절대로, 어떤 방법으로도 가난과 궁핍을 벗어날 수 없다."라는 당시 농민의 현실을 드러낸다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표면과 심층의 모순이 있지만, 그걸 '부자가 되었지만 부자가 될 수 없었다.', '부자가 되었지만 부자가 아니다.' 이런 식으로 '역설법'이 나타난 문장으로 분명하게 표현하지 않는 경우, 작품 해설들에서 보통 '역설적'이라고 부르는 것 같습니다.
농무를 다시 읽어 보았습니다.
농무라는 시는, 실제로는 '농무'의 막이 내린 지점에서 시작합니다. 농무의 뒤풀이에서 현실에 대한 탄식을 하다가 술에 취해 길거리로 뛰쳐나갑니다. 청년은 없고 쪼무래기들만 남은 동네에서 처녀들은 킥킥 대고 누구는 악을 쓰고 누구는 실실거리고 농사는 돈도 안 되고.. 이런 것들이 취한 눈에 죽~ 보입니다. 그런 거리를 한참 꽹과리를 치며 돌다 보면, 불현듯 신명이 납니다. 이를 반어로 해석하는 분들은 '신명이 난다.' 부분이, "와 XX 기분 졸~라 째지네! 응, 아주 그냥 좋아죽~겠네." 이런 식으로 해석된다는 뜻일 겁니다. 나쁘지는 않습니다만,
저는 이때 신명은 '반어'로 읽히지 않습니다. '가설무대'에서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 '농무 공연'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지치고 울분에 찬 농민들이 뒤풀이에서 자신을 달래기 위한 '진짜 농무'를 함으로써, '그래도 힘을 내서 또 살아야지.'하는 진짜 신명으로 느껴집니다. 일종의 승화죠. 고된 노동을 잊기 위해 노동요를 부르는 것처럼요. 나쁘게 말하면 현실 비판에 대한 마취효과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요. 어찌됐든,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라는 본심에 대해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라는 반어적인 말을 한 게 아니라고 해석된다는 뜻입니다. 시 내부에서도 '원통하다'와 '신명이 난다'의 장면 사이에 시간적으로 많은 차이가 있고, 심리적으로도 많은 차이가 있기 때문에 직접 연결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이때 신명이 진짜 신명이긴 한데,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고 보입니다. 첫째, 이런 신명이라도 내지 않으면 '비료값도 안 되는 농사'를 지어야 하는 다음 날을 맞이할 용기가 생기지 않는다는 면에서, 비극적 현실을 강화하는 장치입니다. 이런 경우, 반어도 역설도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둘째, 승화된 신명이든 마취된 신명이든, 어쨌든 울분이 쌓여서 에라 모르겠다, 할 때 비로소 신명이 올라옵니다. '가설무대'에서 보여준 농무는 '공연을 위해' 연습한 가짜 농무이고, 막이 내린 뒤, 뒤풀이도 끝날 즈음에 '진짜 농무'가 시작된다는 점(꽹과리를 불고 다리를 흔드는 표면적인 의미의 농무 + 공동체를 유지하고 고된 노동을 위로한다는 본질적인 농무의 의미)에서 역설적으로 보입니다. 셋째, 오히려 이놈의 신명이라도 없으면 당장 때려치우고 도시로 돈 벌러 떠났을 텐데, 마지막의 마지막에 남아있는 이 신명 때문에 '비료값도 안 되는 농사'를 때려치우지 못하고 다시 농촌에 눌러 앉게 된다는 면에서, 구조적 아이러니로 보는 게 맞을 거 같습니다.
구조적 아이러니는 인물의 의도과 결과가 불일치하는 걸 말하는데 흔히 역설과 구별이 잘 안 됩니다. 운수 좋은 날의 김첨지는 아내에게 잘해주려는 '의도'로 비가 옴에도 돈 벌러 나갔는데, 그 의도의 결과 아내에게 잘해주기는커녕 아내 혼자 쓸쓸하고 외롭게 죽게 만드는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죠. 김첨지의 행동은 'ㅇㅇ적이게도 의도와 다른 결과를 낳고 말았다.'에서 ㅇㅇ에 들어갈 말로 '반어'와 '역설' 중에 어느 것이 어울리는지요? '운수좋은 날'이라는 제목을 반어로 가르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지만, 작품 전체에서 드러나는 이러한 서사적 장치를 아이들과 다룰 수 없다는 게 지금 이 시대 문학 교육의 한계라고 생각합니다.
Quote from: 익명 on Apr 09, 2023, 04:23 PM으으.. 저는 저기 '역설적'이라고 설명하는 부분을 참 싫어 해요..ㅠㅠ 역설법이면 역설법이지 역설적..이라니.. ~적을 붙이면 (꼭 그것이 아니더라도 )그런 성격이 있는... 뭐 이런 식이잖아요... 인간적이다 도덕적이다. 인위적이다 상대적이다 ... <농무>도 상황적 아이러니( 다 죽을만큼 힘든 상황인데도 신명이 나는 상황)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지요. 그냥 역설이라고 하면 '도수장 앞을 와 돌때'랑 신명나는 것이랑은 하등의 모순관계가 없거든요.. 그러니 역설적... 이라는 애매하지만.. 이해가되는 말을 쓰는 것 같은데, 그냥 상황적 아이러니가 차라리 더 좋은 표현같아요의견 감사합니다 ^^ 울분이 터지는 상황에서 신명이 난다고 했으니, 반어는 맞는거겠지요???